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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신라인(4) 개방에서 금욕으로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9년 05월 28일(화)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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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이 설화를 통해서 보면 당시 신라사회의 성풍속이 상당히 건전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앞 장에서 지적했듯이 미실과 같은 여인이 그렇게 설쳐대면서 왕과 귀족들을 들었다 놨다하던 사회는 아니었다. 사실 고신라 시대의 토우장식항아리에 부착된 성애장면을 묘사한 토우를 보면 중고기 신라인들의 성이 상당히 개방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토우들을 보면 당시 신라인들은 다양한 체위로 성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정 시점 이후에는 그러한 성의식이 급속도로 변화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그 시점을 불교 공인 이후부터라고 본다. 금욕적인 불교의 세계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의식의 변화는 진평왕의 처신에서도 드러난다. 비형랑의 4촌인 진평왕은 왕의 자리에 무려 50년 이상 있었다. 그렇게 오래 왕위에 있던 그가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딸만 둘 있었다. 그건 그가 바람기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가 마음만 먹었으며 왕후 이외의 여인에게서라도 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아들을 원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석가모니의 가족과 동일시했다. 해서 자신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사용했고, 왕비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진평왕 부부는 분명 아들 석가를 무척 기대했을 거다. 진평왕이 다른 여인을 통해서라도 왕자를 생산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단순히 황후를 너무 사랑해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왕인 자신도 함부로 궁녀를 취할 수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말년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했고, 삼촌인 진지왕은 황음하다고 왕위에서 쫓겨난 문맥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중고기 신라인의 성의식은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서 검토해봐야 한다. 신라 사회는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했던 농경문화인과 김씨왕족의 유목문화가 공존하던 사회였다. 그래서 일면 성이 개방된 면도 있지만 다른 한쪽은 상당히 보수적이기도 했다.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도화랑의 성관념은 분명 보수적이다. 마침 진흥왕과 진지왕은 왕비를 박씨에게서 취했다. 개방적 사고를 가진 집단과 보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결합했다. 그러니까 고신라 당시 성풍속은 어떤 면에서는 개방적이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보수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개방적이었을 거라고 추론하는 것은 그들이 행하던 근친결혼 풍속 때문이다. 필자는 '신·구당서'에서 "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라고 했을 때 변한은 바로 천산주변에서 서라벌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후손인 신라 김씨왕족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들은 비교적 개방적인 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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