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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비(哭婢)
김영식 시인,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9년 04월 18일(목) 19:12
ⓒ 경북연합일보
오랜만에 삶과 마주앉았다. 그는 예의 버릇대로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가락으론 탁자 위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다. 창밖으론 사월의 바다가 그린 듯 펼쳐지고 유채꽃향기가 간간이 코끝에 와 닿는다. 자세히 보니 그의 얼굴에 잔주름이 깊다. 몇 달 사이 수척해진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쓸쓸해진다.
 퇴직하고 난 뒤, 여러모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치킨가게 운영하는 아들 도와주랴, 몇 군데 강의 다니랴, 병환의 아낼 돌보며 잡다한 집안일까지. 그러다 어느 날 지쳐 힘이 들었고 누군가 붙들고 앉아 밤새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그때, 미리 눈치 챈 그가 먼저 만나자는 제의를 해 왔다.
 간단하게 식사를 겸할 수 있는 <바다>는 평일 오후라 한적했다. 초로의 주인아주머니는 어느 새 귀밑머리가 하얗게 쉬어버렸다. 세월은 누구든 비켜가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서둘러 탁자를 정리하며 창가자리를 내어주었다. 그와 나는 전혀 취미가 다르지만 이 선술집만큼은 의기투합, 의견이 일치했다. 방파제 입구에 위치한 이곳에선 가끔씩 밤바다 위로 피어나는 시거리를 볼 수 있었다.
 멀리 수평선 위로 몇 척의 배가 지나가고 갈매기들은 모빌처럼 공중에 떠 있다. 귓밥을 간질이며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방파제 끝에 앉은 두 개의 등대는 나른한 햇살 아래서 모처럼 한가한 모양이다. 수채화 같은 초록 속으로 한 쌍의 연인이 서로 어깨를 기대며 걸어간다.
 어느 가수는 삶이 자신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고 노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삶은 내가 슬프거나 힘들 때마다 찾아와 대신 울어주었다. 술이며 밥을 사준 적도 많았다. 내가 울고 싶을 때, 그는 한 번도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
 둥지 같았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끝내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때, 영문도 모른 채 첫 사랑을 보내야했을 때, 원양어선을 타고 망망대해에 흔들리며 떠 있을 때... 어찌할 수 없는 캄캄한 고비마다 삶은 곡비처럼 내 앞에서 꺼이꺼이 통곡했다. 나보다 더 세상을 원망하며.
 조금씩 사위가 어두워져 간다. 종일 심심했을 등대가 깜빡거리며 불을 켜자 기다렸다는 듯 배 한 척이 입항한다. 아마 며칠 간 먼 바다로 출어했던 것이리라.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해안선을 따라 둥글게 늘어선다. 일을 마친 어부들이 두런두런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이 되면 그 많은 갈매기들은 어디에 지친 날개를 눕히는 걸까?
 오늘은 내가 술값을 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자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자린고비 같은 자네가 오늘은 웬일이냐?"고 묻는다. 하기야 이제껏 숱하게 만났어도 제대로 술 한 잔 사거나 밥 한번 대접하지 못했으니 할 말이 없다.
 선술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거리로 나섰다. 비 온 뒤라 만개했던 벚꽃이 길 바닥에 수놓은 듯 흩뿌려져 있다. 그는 잠시 내 어깨를 토닥이더니 다음에 또 만나자며 돌아선다. "언젠가 나도 자네를 위해 울어줄 날이 있을 걸세" 등 뒤로 손을 흔들며 곡비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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