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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의 인물 미실
정현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9년 03월 26일(화)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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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사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미실이 가공인물이란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진흥에서 진평에 이르는 시기는 신라왕실이 불교적 세계관을 수용해서 국민통합을 이루려고 했던 시기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은 말년에 왕비와 함께 출가를 했고, 진평왕은 자신과 왕비의 이름을 백정과 마야로 했는데 그것은 석가모니 부모님의 이름이다. 자신을 석가족의 왕으로 인식하려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나라를 다스리는 지존인 왕이 불교적 관념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리려고 하는 데 미실과 같은 바람기 많은 여인과 놀아날 수 있을까. 그런 왕을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랐을까. 진평왕만 해도 그렇다 자신을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백정으로 생각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는 아들 석가가 환생하기를 누구보다 염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을 두지 않았는가. 50여년 왕위에 있으면서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얻지 못하고도 후비를 들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가 불교적 삶에 충실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진지왕도 그렇다. 화백회의를 통해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릴 때의 명분이 그가 황음(荒淫)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탐했던 절세가인인 유부녀 도화녀는 어땠는가. 왕이 궁으로 불러 한 번 자자고 유혹했을 때 과감히 청을 거절했다. 그 거절 명분이 무엇이었나. 바로 지아비가 있는 지어미이기 때문에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잘 알다시피 둘의 사랑은 진지왕이 죽고 난 후에 그것도 도화녀의 남편이 죽은 후에야 성사된다. 적어고 기록에는 그렇게 전한다. 미실의 성의식과 완전 딴판인 절세의 미녀가 서라벌에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뿐만 아니라 미실은 바람둥이 진지를 마다하고 그를 폐위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또한 의심스럽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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