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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김영식 시인,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9년 01월 17일(목) 17:37
ⓒ 경북연합일보
이맘때쯤이면 먼 나라 얘기처럼 눈 소식을 듣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P시는 한반도 남쪽이라 눈이 귀한 고장입니다. 섣달 무렵, 가끔씩 폭설이 내리기도 하지만 다른 지방보다는 아무래도 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눈은 크리스마스카드나 옛 애인처럼 그리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눈이라면 먼저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가 떠오릅니다.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 한계령을 넘다가 /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 …… / 오 눈부신 고립 /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누군들 한번쯤 그런 상상을 해보지 않겠어요. 못 잊을 사람과의 여행 중 우연처럼 폭설이 내린다면, 우연을 핑계로 한 사나흘 그 속에 갇힌다면. 사방엔 고라니와 꿩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 천지는 적막하고, 눈은 자꾸만 내려 골짜기는 깊어지는데. 흰 감옥 같은 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을 짐승들의 따뜻한 체온처럼, 어깨에 기대오는 사람의 머릿결과, 가슴 두근거림과. 생애 단 한번만이라도 그런 아름다운 난파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나는 또 김광균의 <설야>를 생각합니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처마 끝에 호롱불 야위어 가며 /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문학에 심취했던 고교시절, 곁에 두고 애송하던 시입니다. 겨울밤이면 처마 끝에 백열등이 켜진 초가집 외딴 방에 앉아 흩날리는 눈 소리를 들으며 몇 번이곤 이 시를 외웠습니다. 시를 읽다보면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한 지식인의 고뇌가 엿보이기도 하고, 그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여인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서정성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 해 겨울에도 폭설이 내렸습니다. 모두가 가난할 때였지요. 여동생이 P시의 고등학교 시험을 보러가는 날이었습니다. 동생과 나는 돌아누운 부모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바깥엔 눈보라가 몰아치고, 가난한 집안 형편에 어데 공장에나 취직 않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딸이 미워 부모님은 끝내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문밖을 나서니 눈은 이미 마루까지 차 있었고 마파람이 휘몰아쳤습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골목을 걸으며, 여동생은 앞서고 나는 뒤서고. 그때 생애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단어를 배웠고 삶이란 캄캄한 낭떠러지와 직면했습니다.
 어느 곳에선 대설주의보가 발효되고, 어느 오지에선 마을이 잠겼다하고. 그런 날이면 어떤 고립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못 잊을 사람과의 사랑이든, 한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고뇌이든, 감당할 수 없는 가난의 무게이든. 그 차가운 운명 속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삶에 대하여 명징하게 깨우칠 수 있는 정신의 고통이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날이면 당신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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