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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시간
이화리 소설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12월 18일(화)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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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한 해가 무심히 간다. 365일의 8,760시간이 흘러갔다. 어디로 갔는지, 누구 시간을 본 사람 있나요? 누가 또 떠난 시간을 찾아올까요? 세상 최고의 부자나 과학자도 이미 지난 시간을 가져오지 못한다. 미래의 시간을 가져와 고칠 수 없듯, 시간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그 무엇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모든 생(生)에게 시간만큼 중요한 그 무엇도 없다. 우리가 분명, 시간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이 아닌 시계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수치로 정리한 달력을 보았다. 해와 달을 보았을 뿐 시간이라는 주어의 형체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 시간의 주인은 우주다. 우주의 흐름에서 생겨난 무형의 존재를 우리는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다만 느낄 뿐이다. 그건 우주의 흐름인 천체의 조화다. 한 해의 마지막에는 누구나 지난 일들을 되돌아본다. 해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온 세상에 일어난다. 그건 바로 살아있음의 증명이다. 모든 생물은 때로 충돌하고, 다시 화합하며 지낸다. 한 개인에게도 세상의 이치와 같이 소소하거나 엄청난 일이 닥쳐와 우린 끊임없이 고뇌하고, 성찰하며 산다. 전무하게 행복한 한 해도 없고, 전무하게 불행한 한 해도 없다. 순금의 순도가 100%가 아니듯 기쁨도 슬픔도 완전무결하지 못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체험들이 지혜가 되어 꼿꼿하던 이상을 조금씩 깎고, 죽을 만큼의 고통에서도 무연히 대처한다. 참는 것이 어른이라는 이 완강한 질서에도 때론 길항의 흔적이 남는다. 사람 사이에 가장 우선하는 예의가 사라져 깊은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갈등한다. 차마 정면에서 맞받아치기에는 유치하며 천박하고, 그냥 무던히 참고 있을 수 없는 저항이 일어날 때다. 그럴 때 우리의 반면교사는 바로 정의다. "불의가 정의가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이제 며칠 후면 올해가 다 간다. 아흔의 어르신부터 예닐곱 아이까지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이 시점에 나도 깊은 생각에 잠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판단 가운데 '디케의 저울' 눈금이 있다. 치우침 없는 공정성이 정의다. 간혹 잘못된 법 판단을 비웃을 때, 우리는 눈을 가린 디케의 여신상을 만든다. 눈을 가린 디케가 저울의 균형적 눈금을 제대로 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조리에는 암묵적 다수의 합의가 있다. 저항하지 않는 침묵은 합의의 동의어로 쓰인다. 나는 올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불의를 지켜보기만 했는지 돌아보자. 못 본 체하고, 못 들은 척하는 그 순간들이 다 사회악을 키우는 거름이 된다. 선은 밝음의 양지 앞에 나서지만, 악은 음지를 좋아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곰팡이 포자처럼 잘 자라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당연한 결론 앞에서 사회구성원인 우리가 행한 정의로움에 스스로 박수를 보내는 사회라야 건강하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떳떳한 한 해였는지 내가 나에게 질의하고 대답할 시간이다. 시간은 애초 지구인 그 누구의 소유가 아니어서 빈자든 부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공평하게 주어지는 최상의 선물이다. 해마다 받는다고 시간을 함부로 쓸 수 없음은 현대과학도 다 풀지 못한 우주에서 온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해의 마지막에 다가오는 시간은 반성을 밀린 숙제처럼 내민다. 초등생들도 이맘때면 반성문을 일기로 쓴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안다. 그냥 다 그려려니 해서도 안 되고, 그저 지난 것은 지난 일일 뿐이라는 망각도 위험하다. 반성은 정신의 귀중한 먹이다. 잘못은 돌이킬 수 없지만, 반복되지 않아야 떳떳하다. 내년 이맘 때 나는 어떤 글을 또 쓰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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