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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천 '신라역사 속으로' 월정교에 담긴 원효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경주 밤 풍경 새 볼거리로 떠오르는 월정교 장관 속 러브스토리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의 결실… 위대한 설총을 낳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10월 17일(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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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남산은 경주시의 남쪽에 솟은 산으로 신라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월정교는 신라왕들의 남산 행보를 잇는 다리로 월성에서 이 다리를 건너가면 남산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새롭게 복원된 월정교는 길이가 66m나 되고 다리의 양쪽에 문루가 있어 보기 드문 교량으로 건축학적 의미가 크다. 가교(架橋)는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대상을 이어 주는 사물이나 사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최근 준공을 마친 경주 월정교가 경주관광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동궁과 월지에 국한된 경주 관광의 밤풍경을 바꿔 놓으며 야간에는 조명등을 켜 장관을 이룬다. 문천에 비친 모습은 몽환적이기까지 해 경주의 새로운 문화관광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다. 가을밤 반월성을 감고 흐르는 문천을 따라 여유롭게 거닐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려 다리에는 유난히 남녀의 애틋하거나 아름다운 사랑이 많다. 월정교 아래 누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정교 복원공사 발굴 때 서쪽 19m 아래쪽에 나무로 만든 다리 터가 확인됐다. 요석공주는 신라의 공주였고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 몸이 된 이른바 '돌싱'이었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사모해 의도적으로 물에 빠져 요석공주의 궁에서 옷을 말리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의 결과, 신라 10현의 한사람인 설총이 태어난다. 이두문자를 발명한 설총의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결혼 이후 파계승으로 대중불교의 지평을 열어가게 된다. 원효의 사상은 일심(一心)이라는 용어에 응집돼 있다. 일심이란 모든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의 진여(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은 항상 망념과 번뇌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무지(無明) 때문에 미망의 현상적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으면 곧 마음은 그 원천으로 돌아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진(眞)과 속(俗), 부처와 범부, 보리(불교 최고의 이상적 경지인 정각(正覺, 올바로 깨달음)의 지혜)와 번뇌 간의 대립이 해소되는 것이다. ◆경덕왕, 문화전성기 이뤄 월정교는 통일신라 경덕왕 19년(760년)에 건립했고,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덕왕은 신라 제 35대 왕이자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헌영(憲英). 효성왕(孝成王)이 자식이 없자 739년에 태자로 책봉됐다가 742년 왕위에 올라 강대해진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개혁을 시도했으며, 불교중흥에 힘쓰는 등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맞게 했다. 그러나 귀족세력을 누르고자 했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가 말년에는 귀족세력과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경덕왕대에 불교 중흥이 이뤄져 영흥사·굴불사·불국사 등 많은 절을 세웠으며 석굴암도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강대해진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개혁을 시도했으며, 불교중흥에 힘쓰는 등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맞게 했다.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여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고 산업발전에도 힘썼다. 불교 중흥에도 노력해 황룡사(皇龍寺)의 종(鐘)을 주조하고, 굴불사(掘佛寺)를 비롯해 영흥사(永興寺)·원연사(元延寺)·불국사 등 절을 세웠으며 석굴암도 이때 축조됐다. 경덕왕은 765년 세상을 떠났으며 경주 모지사(毛祗寺)의 서쪽 언덕에서 장사지냈다고 한다. 왕릉은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에 있다.
<전문가에게 듣다>
 |  | | | ⓒ 경북연합일보 |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구나 (위덕대학교 신상구 교수.)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경의 축을 열고, 춤추는 호로병은 마침내 온 길거리에 바람 타며 걸려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은데,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소상 허망도 하여라."
이글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원효를 찬미한 시다. 시를 통해 일연은 무덤의 해골물을 통해 진여(眞如)를 깨달은 원효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저자거리에서 박을 치며 무애가를 부르던 원효와, 문천의 물길을 따라 요석궁으로 들었던 원효를 기리면서, 문닫힌 분황사 소상을 통해서 유한한 인간 삶에 대한 무상함도 드러내고 있다. 원효는 당고승전에 이름을 올린 학승이며, 일본에서 대명신으로 숭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며, 우리에게는 걸림 없는 삶을 살아간 희대의 괴짜승, 파계승으로 인식된다. 그는 논쟁과 화합, 대립과 조화라는 두 가지 문제를 천착했지만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사상적으로도 현실생활에서도 그야말로 자유인이었다. '금강삼매경론'에 실려있는 "무릇 일심(一心)의 근원은 유(有)와 무(無)를 떠나 홀로 깨끗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여(眞如)와 세속을 융화하여 깊고 고요하다. 세속을 융화하여 맑고 고요하다. 둘을 융화하되 하나로 합일하지는 않는다(夫一心之源離有無而獨淨 三空之海融眞俗而湛然 湛然融二而不一)"라는 원효의 글은 마음은 있고 없음을 떠나 홀로 맑으며, 진여와 세속을 융화한다고 하여 일탈의 근원이 된다. 원효의 생각과 삶이 이러하였기에, 춘원은 "원효는 신라가 낳은 가장 큰 사람이오 고승이오 성승이다. 그의 대승기신론소와 화엄경소 는 불교가 전하는 동안 전할 것이다. 원효는 세계적 위인이다. 그러나 원효는 요석공주로 하여 파계하야 설총을 낳았다. 그는 어찌 하여서 파계를 하였던가. 성승의 파계 그것은 큰 사건이다"라고 '원효대사'를 연재(1942년, 매일신문)하면서 말했다. 춘원이 칭송한 성승의 파계는 다음의 노래에서 비롯된다. "어느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원효가 거리를 다니며 불렀다는 노래다. 이 노래의 뜻을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태종무열왕만이 이 노래를 듣자 그 의미를 알았다. 그래서 원효를 찾아오게 했다. 원효는 남산의 삼화령에 올랐다. 그리고 삼화령의 미륵부처께 차를 공양하고는 동남산 자락으로 내려와 문천을 지나다 물길에 빠진다. 태종의 명을 받은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간다. 설총은 이렇게 해서 태어난다. 이후 원효는 세속의 옷을 입는다. 원효가 입은 세속의 옷은 고답적인 불교가 일상으로 내려오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원효의 요석궁 행은 단단하게 닫혀있던 신들의 세계의 빗장을 허무는 울림이었다. 원효는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였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생각과 행동이 화쟁(和諍)을 원융(圓融)의 침대로 향하게 한 것이다. 무엇에 기쁨 슬픔 있으며, 어디에 탐내고 미워하랴 부지런히 사유하라, 이러한 몽관법(夢觀法)을 점점 갈고 닦아, 여몽관(如夢觀)의 삼매 얻으면 이 삼매로 해서, 무생인(無生因)도 얻게 되어 긴 꿈으로부터, 활연히 깨어나 원 근원을 알아, 길이 헤매임 없이 이 한마음, 일여(一如)한 침대에 누워 있네. - 원효'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서
김희동 기자 khd@kby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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