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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어낸 고대사(20) 물 위에 왕릉을?
정현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10월 17일(수)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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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원성왕릉을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신라인들의 풍수적 관점이 후대 중국에서 들어온 관점하고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성왕릉을 괘릉이라고 부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왜 괘릉이라고 불렀을까? 괘릉이란 이름이 만들어진 연유가 있다. 원래 이곳에는 곡사란 절이 있었다. 왕이 유언으로 곡사에 묻으라고 하자, 절을 옮겼다. 옮긴 절은 후에 숭복사라 했다. 사실 곡사 터는 원래 습한 곳이었다. 지금도 비오는 날이나 비온 후에 괘릉을 가면 물이 고인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능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파자 관이 들어갈 자리에 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차오르다 멈춘 그 위에 바위를 놓고 관을 걸쳐놓고 능을 조성했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붙여 '괘릉'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현장에 가보면 능을 둘러 물길을 내 놓았다. 비가 오거나 하면 능 뒤의 산에서 물이 스며 나온다. 능 아래로 물이 흐른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왕의 관을 물 위에 올려놓고 무덤을 쓴 셈이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괘릉 자리가 실제로 물이 찾던 늪지였을까. 물론 발굴해 보아야 진실을 알 수 있겠지만,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괘릉 터에는 원래 작은 연못이 있었다. 왕릉은 명당 중의 명당이어야 할 텐데, 굳이 물이 고이는 늪지에 왕릉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신라인들의 무덤에 대한 사고방식이 달랐기 때문 아닐까? 풍수에서는 무덤 아래로 수맥이 흐르는 것도 나쁘다고 하는 데, 물이 차는 곳은 아주 흉한 터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많아 조상의 무덤을 이장했는데 무덤에 물이 고였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그러한 땅에 일반인의 무덤도 아닌 왕릉을 썼다는 것은 신라왕족의 기원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그렇다면 당시 신라인들은 중국인과 다른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신라의 풍류도는 신라 고유의 의식세계를 담고 있었고 그들만의 독특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속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 속에 남아 있다. 무속인들이 산에가 기도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늘 산중에 있는 바위틈에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바위틈을 땅 여신의 자궁으로 생각했다. 그곳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온다고 믿었다. 그곳을 생명이 태어나는 상징적인 자궁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을 통해 저승에 있는 신들도 만날 수 있고, 소원도 전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황천(黃泉)으로 간다고 믿었다. 황천은 땅 속에 있는 생명의 샘이다. 땅 여신의 자궁이기도 한 바위틈에 대고 조상들은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풍요를 기원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생명관이 후대의 중국 풍수와 다른 우리 자생 풍수관과 관련 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풍수사상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전통적인 지리 관념이 있었다. 어떤 부족이 이동하여 터를 정할 때 경제적 군사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을 선택한다든지, 공동체 주변의 특정한 지역('蘇塗')을 신성시한다든지 했던 것에서도 자생적 지리 관념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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