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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어낸 고대사(19) 서라벌을 활보하던 서역인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10월 10일(수)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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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올해 제46회 신라문화제가 3일부터 9일까지, 7일간 월정교, 첨성대 동부사적지 일원에서 열렸다. 신라문화 한눈에 확인하며 즐길 수 있었다. 모두가 잘 아는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도 신라의 밤거리를 늦도록 거닐며 취했을 것이다. 처용이 서역인이라는 설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 잠시 처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서울 밝은 달밤에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것이지만 /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이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자기 잠자리에 웬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동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도 처용은 대담한 행동을 한다. 화를 내기는커녕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며 물러났다. 그러자 아내를 범하던 자가 그 본모습인 역신으로 나타나서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는, 처용의 행동에 감동하여 약속한다. 앞으로 당신(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전염병)의 방문을 피했다. 처용 형상이 벽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처용의 아내가 바로 무가에 등장하는 바리공주라고도 한다. 여성 무당의 출현이 바로 처용부인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악학궤범』에는 처용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처용탈이 그려져 있다. 처용탈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다소 험상궂으며 얼굴색은 한국 사람과는 다른 붉은색을 뛴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처용탈은 붉고 이가 희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처용을 형용한 처용탈의 피부색은 붉은색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거다. 왜 그랬을까. 처용이 우리 모습과 다른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용은 어디에서 온 이방인이었을까? 처용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의 출신을 유추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편에 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왕이 현재 울산에 있는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귀경하려 할 때 안개가 자욱해 길을 잃는다. 그러자 일관이 다음과 같이 아뢴다. "동해 용왕의 조화 때문이니 용왕을 위해 절을 지어주면 좋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하라고 하자, 용왕의 일곱 아들이 왕을 위해 춤을 춘다. 그 중 한 아들이 왕과 함께 귀경해 벼슬도 얻고 예쁜 아내도 맞이한다. 그가 처용이다. 처용이 서울에 살면서 벌어진 일이 처용가로 남아 있다. 처용이 등장하는 정황을 살펴보면, 이 때 등장하는 용왕의 아들은 바로 멀리 해로를 타고 온 아라비아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인들은 천연항으로 동남쪽 최고의 입지를 가진 개운포로 들어왔다. 바다 저 멀리서 이국적인 사치품을 싣고 온 아랍인들이 신라인들에게는 남녘 먼 바다의 용궁에서 온 사람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당시 신라와 아라비아는 교역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페르시아 왕실과 신라 왕실이 인연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실린 책이 최근 발견되었다. 『쿠쉬나메』라는 책이 다. '쿠쉬나메'는 '쿠쉬의 책'이란 의미이며 쿠쉬는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자 영웅이다. 이 서사시에는 7세기 중엽 멸망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유민들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핵심 줄거리는 지도자인 아비틴이 당나라로 망명했다가 다시 바닷길로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와서 정착했으며, 신라 공주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후일 고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정황들을 이해하고 보면 왜 원성왕릉에 서역인, 더 엄밀히 말하면 페르시아 무사가 능을 지키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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