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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번지다
김영식 시인,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10월 04일(목)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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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산그림자 내려와 추색(秋色)이 완연합니다. 갈대 위로 해오라기 날아가고 발아래 감국은 파스텔톤으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해거름 녘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봅니다. 맞은편 기슭으로 천천히 물안개가 번집니다. 봄이 피어남이고 여름이 자람이라면 가을은 번짐입니다. 폭염과 소나기와 매미소리가 시간의 캔버스 위로 스며들어 단풍이 들고, 오솔길이 고즈넉해지고, 강물은 깊어졌습니다. 번짐이 없었다면 가을은 어찌 가을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무엇이든 그냥 이루어지는 건 없는 것이지요. 피어남과 자람이 개별적이라면 번짐은 다분히 상대적입니다. 타자와의 소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것은 일방적이지 않고 강제성을 띄지 않으며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상호호혜주의에 바탕을 둔 이타성이 본질입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다면 어떤 완성도 그 의미가 축소되어져 버릴 것입니다. 흔히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견이 아니고 침략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에 정착하기 위해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던 숱한 원주민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제대로 스며들지 못하고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어떻게 화합해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일깨워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채화는 번짐의 습성을 활용한 그림입니다. 폴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이나 <사과>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동양화에서의 발묵도 그런 기법입니다. 안개나 먼 산을 그릴 때 종종 사용됩니다. 천에 쪽물을 들일 때도 서서히 퍼져나가도록 합니다. 그래야 색감이 가파르지 않고 은은해지기 때문입니다. 번짐은 시간의 중첩입니다. 수많은 시간의 입자들이 모여서 흐름을 만들고 흐름이 제대로 숙성되어야 아름다운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사회는 결과만을 중시하거나 단지 목표지향적일 때가 많습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쉽게 간과해버리고 맙니다. 성급한 물질주의의 팽배와 만연을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햇살이 번져 상수리나무열매가 익고 바람이 번져 꽃무릇이 피어나며 이슬비가 번져 냇가를 이룹니다. 이처럼 우리가 만나는 풍경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의 결집들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숱한 희생과 헌신으로 계절은 조금 더 깊어지고 먼 산은 청람빛을 띄게 되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우아함과 청순함이 매력인 그녀는 노년에 아프리카 등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게 됩니다. 부귀와 편안함 대신 낮고 천함을 선택한 것입니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타인을 돕는 손이다' 번짐의 가치를 몸소 실천한 그녀의 말입니다. 단풍 내려온 호수에 노랗게, 붉게 물이 들었습니다. 모감주나뭇잎색깔로, 산벚나뭇잎색깔로. 산색과 물색이 하나로 어우러지듯, 이 시월엔 당신과 나도 서로에게 가만히 번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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