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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인이 지키는 괘릉과 풍수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문화로 읽어낸 고대사(18)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09월 11일(화)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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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신라 통일기의 왕릉은 도심의 동남쪽 방향을 따라 조성된다. 동해바다를 향해 줄지어 가는 형국이다. 그 중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는 38대 원성왕릉이 있다.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한 참을 가다보면 불국사역이 나오고 거기에서 3~4킬로 정도 울산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나지막한 야산이 있다. 그곳에 있다. 우리에겐 괘릉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한 이 능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첫째는 능을 지키고 있는 서역인풍의 무인상 때문이고, 둘째는 풍수적 관점 때문이다. 새로운 시선으로 괘릉을 한 번 답사해 보자. 괘릉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가장 완비된 능묘라는 점 때문에도 주목받는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모방하진 했으나 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을 가미해서 완성했다. 능의 호석으로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인이 창안한 독특한 양식이다. 난간석도 그렇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은 동류의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후의 우리나라 왕릉은 대부분 괘릉을 모델로 해서 발전한 양식이다. 한마디로 이 능은 이후 왕릉의 교본이 된 셈이다. 현장에 가보면 봉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문인석과 무인석, 화표석(이곳이 왕릉이며 신이 걸어 다니는 길임을 알려주는 돌기둥.)이 잘 조성되어 있는데, 특히 무인상이 서역인의 복장을 하고 있어 주목받는다. 도대체 이 무인상은 누구를 모델로 했을까?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어쩌면 당시 신라 조정에 봉사하던 서역인 호위무사였을 지도 모른다.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이 최근에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통일신라 조정에서 괘릉을 지키는 수호신(무인)으로 이국적인 서역인을 선택했다는 것이 상당히 흥미롭다. 페르시아인이 아니라고 해도 서역에서 온 아라비아상인을 호위하던 호위무사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고대사회에서 장거리 무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는데, 해적이나 도적떼를 만났을 때 자신들을 보호할 호위무사들이 꼭 필요했다. 그런 무술경호인들이 무역상을 호위하고 서라벌 시내를 활보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에는 서역인들이 많이 살았다. 뿐만 아니라 서라벌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부터 서역인이 들어와 살았다. 경주 황성동 석실묘에서 출토된 토용(土俑, 통일신라-7세기), 그러니까 흙으로 만든 사람인형 중에 서역인의 모자를 쓴 심목고비한 인물(소그드인으로 추정)이 있는 것도 한 가지 예이다. 또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에는 홀을 들고 서 있는 턱수염이 긴 서역인풍의 문관상도 있다. 서역인이 신라조정에서 일을 했다는 증거다. 통일신라시기에 서역인이 경주에 자주 왕래 했다는 사실은 최치원이 남긴 시에서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쓴 시 중에 당시 국제상인이었던 소그드인의 춤을 묘사한 '속독'이라는 것이 있다. "헝클어진 머리 남빛 얼굴 못 보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뜰에 와서 나는 새처럼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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