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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칼럼
노각의 발견
김영식
시인,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08월 15일(수) 18:13
ⓒ 경북연합일보
투탕카멘의 유물 같다. 황금색으로 만든 <달의 배>는 이랑에 걸쳐져 있다. 긴 가뭄 끝에 오랜만에 와본 텃밭의 오이는 껍질이 노랗게 변색되어 버렸다. 짙은 녹색의 오이는 보았지만 누런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싶어 버릴까하다 그래도 애써 가꾼 수확물이라 바구니에 담았다.
 노각은 늙어서 빛이 누렇게 된 오이를 말한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넘은 나이랄까. 이렇게 되면 우선 색감도 떨어질 뿐 아니라 맛도 훨씬 덜할 것 같다. 보기에도 무슨 황달이나 걸린 듯 초췌해보이니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게 사실이다.
 노각이 칼슘, 식이섬유, 칼륨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는 걸 인터넷검색을 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수분이 많아 숙취해소나 해독작용에 좋으며 항암, 항산화, 노화방지, 변비개선 등 효과가 다양하다고 한다. 늙은 오이는 겉과 속이 질기기 때문에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낸다. 그런 후 채로 썰어 무침을 만든다. 소금에 한 시간여 절여놓았다 고추장에 버무리면 여름별미가 된다. 오이의 완성이다.
 누구든 오래되면 쓸모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래도 싱그러움이 넘치는 젊음보다 좋기야할까. 그러나 나이 듦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여러 가지 그윽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라든가 넉넉함이라든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구분된다. 무수한 실패와 절망과 고난을 극복해낸 시간의 축적은 젊음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한나라의 시조 유방이나, 삼국시대 촉한을 세운 유비는 모두 나이 먹어 뜻을 이룬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작가 박완서는 불혹의 나이를 지나 등단했으며 브루크너는 마흔 살이 넘어서야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강태공은 70대에 중용되었고 미국의 민속화가인 그렌마 모제스는 78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유명화가가 되었다.
 대기만성형 인물들을 살펴보면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이르는 과정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각의 의미는 혼신의 힘을 다한 절차탁마에 있다할 것이다. 강의 하류는 치열했던 골짜기의 시간을 품고 있고 노거수는 숱한 바람의 흔들림을 지나왔다. 그것들에서 우리는 마음의 고요나 평화를 만나게 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했다. 하루가 멀다않고 트랜드가 바뀌고 제품들은 혁신을 거듭한다.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어버리고 마는 숨 가쁜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혹시 우리는 오래된 것들의 가치를 잊어버리진 않나 안타까울 뿐이다.
 대기만성의 출전은 <노자> 제41장이다. 대방무한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인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큰 사각은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소리가 희미하며, 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노각은 큰 사각이며 큰 그릇이고 큰 소리이자 큰 모습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등장하는 오이도 땅에까지 닿은 걸 보니 늙은 오이를 그린 것이 아닌가 싶다.
 오이무침으로 점심 한 끼를 가뿐하게 해치운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도 오늘은 거뜬히 이겨낼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노각의 힘이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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