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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연합일보 2018 기획취재] 시경에 나오는 '한국'의 韓城遺址(한성유지)… 대한민국의 정체성의 뿌리 공간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07월 29일(일)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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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세상에 이름 없는 것은 없다. 들에 핀 풀꽃조차도 이름을 갖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으로 존재의 인식에 대해 읊은 시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은 헌법 표제 및 제1조에 따라 공식 국호이다. 역본 및 정부령에 따라 정식 영문으로는 Republic of Korea라 한다. 이쯤 되면 우리의 국호인 '대한'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의문을 품게 된다. 지난 2회기 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공공족이 한원에서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흔적을 찾기 위해 북경시 밀운현의 운봉산과 조선하를 답사하면서 우리민족 건국신화의 무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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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한혁편의 한후(韓侯) 길 위에는 모든 것이 있다.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삶의 시간이 이어져 문화가 되고 역사가 돼 전해진다. 오래전에 역사학자인 동빈 김상기(1901∼1977)는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 한국은 처음에 섬서성 한성현(韓城縣)에 있다가 하북성 고안현으로 이동했고 다시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한(韓)'의 기원을 한혁편에 나오는 한국에서 찾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 후 여러 사람에 의해서 거론됐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한국 상고사를 다루면서 밀운현의 공공성을 한민족과 관련지은 적이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이곳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곳을 한국인으로 방문한 것도 우리 일행이 처음일 것이다" 정형진 신라얼문연 원장은 공공성을 답사한 후 북경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공공성을 잠시 들렀다가 떠나는 아쉬움을 말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이곳에 며칠 머물면서 운봉산에도 올라 보고 주위 경관도 살피면서 조상들의 여운을 느껴보기로 하고 남산을 빼 닮은 운봉산과 조선하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났다. 밀운현으로 돌아온 일행은 북경까지 가는 버스에 올랐다. 밀운에서 북경으로 이동한 우리는 시내의 서쪽에 있는 유리창(琉璃廠)을 구경했다. 이곳은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한 곳으로 고미술, 고서적, 지필묵 등을 파는 곳이다. 북경에서 하루 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남쪽으로 향했다. 끝없는 하북평원을 1시간 정도 지나서 도착한 곳은 고안현(固安縣) 대한채(大韓寨)라는 마을이다. 이곳은 북경의 천안문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랑방시(廊坊市)) 고안현에 있다. ㅊ대한채 마을은 고안현에서 남쪽으로12km 정도 떨어져 있다. 공공성과 달리 이곳은 한민족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이미 제기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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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이름 '대한' 마을 입구의 간판에는 '하북고안대한채일촌(河北固安大韓寨一村)'이라고 씌어있었다. 마을에 도착한 우리를 본 어린이들이 유치원의 문에 매달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치원 이름도 '대한채영사유치원'이다. 마을 어디를 둘러봐도 '대한채' 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어 왠지 친근감이 든다. 대한채는 다른 말로 하면 '대한성(大韓城)'이다. 이는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인 듯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온 신라얼문화연구원 회원들에게 '대한'이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왔다. 우리 옛말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다. 그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뜻하지 않은 일을 공교롭게 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대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 2일 대한채촌을 찾았을 때도 장날이었다. 촌 단위로는 제법 큰 마을이었고 비교적 부유한 농촌으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과일과 농작물이며, 생필품을 사고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붐벼 운좋게 다양한 것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옛날 이방인의 성이였던 이곳에 지금도 이방인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회족(回族)들만이 집단을 이뤄 살고 있는데 인구는 약 1300여 명쯤 된다고 한다. 이들 회족들은 아직도 한족과 통혼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유럽인종과 몽골리언의 혼혈로 유서 깊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정형진 원장은 "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머릿속에는 과거 천산을 넘어와 몽골리언과 혼혈되었던 사카족들이 떠올랐다"며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 두 번째 책에서 신라의 김씨 왕족은 몽골리언과 혼혈된 사카족이라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이곳은 화북평원에 위치한 관계로 완전한 평야 지대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광활한 대지 그 자체였다. 이곳에 살던 고대 한국인들은 농경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중심으로 한 때 동북지역의 강자역할을 했던 한국인들은 북쪽의 연산 지역과 동북 지역의 주민들을 통제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제적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당시 이곳이 살기 좋았음은 '시경'한혁편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韓國)은 어디에 있었는가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 한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나 대체로 두 가지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 하나는 섬서성 한성현의 한성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 한성채라는 설이다. 그리고 한성의 한후가 어떤 뿌리를 가진 사람인가도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필자가 고안현에 있는 대한채를 찾아가기 위해서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고안현의 자료에 "주나라 성왕이 그의 동생을 한후에 봉했으며, 주나라 성왕 12년(기원전1052) 연나라로 하여금 한후의 성을 짓도록 했으며, 그 치소는 고안한채였다. 그 후로 이곳을 한후국이라고 한다"고 실려 있었다. 그러나 성왕이 자신의 동생을 한후에 봉했다는 문헌 기록은 없다. 다만 중국인들이 스스로 추측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중국 상고 시대의 전설에 나오는 공공족이나 요·순·우임금 때의 공공족, 그리고 상나라 때의 공방(工方) 등을 추적해보면 한후국은 공공족과 관련 있으며 그들이 한국의 주도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과 후대의 진(晋)나라에서 분리된 춘추전국시대의 한(韓)나라와는 다르다. '시경' 한혁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고 전설시대부터 주나라 초기까지 중원(韓原)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중국의 역사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의 곽조경이나 조선 후기의 한치윤도 시경의 한국과 전국시대 고조선을 연결지었다. 김희동 기자 khd@kby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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