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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과 한씨조선의 뿌리 공간을 찾아서> 2. 공공성 앞을 흐르는 조선하와 박달촌… 바람타고 흐른 고대문화의 비밀
'북경시 밀운현의 공공성 앞을 흐르는 강은 조선하였다'
단군조선 건국신화의 무대부터 신비의 공간 박달촌까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07월 22일(일)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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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연일 식을 줄 모르는 폭염으로 전국의 자치단체들이 무더위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기상청은 기후 환경변화 적응 대책수립의 필요성과 내실 있는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문화중심지 이동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기후의 변화이다. 인간의 체질과 문화는 이웃집단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리고 자연과 사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천해 왔다. 최근에는 유전학 연구로 인류의 이동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가 드러나고 있다. 1회 답사기에서 우리는 요임금 말년에 유릉으로 이주해 북경시 밀운현 연락촌에 정착한 공공씨의 거주지인 공공성에 관해 이야기 했다. 자장스님은 바로 그 공공씨가 진한을 주도했던 세력의 조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공공씨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인 셈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후기 홍산문화를 계승하고 있던 맥족과 연합해 단군조선을 세웠다. 공공성은 우리에게 건국신화의 무대가 되는 셈이다.
|  | | | ⓒ 경북연합일보 | |
◆공공성 앞을 흐르는 조선하 밀운현 공공성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멀리 미루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우리나라 어디에 옮겨놓아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정든 풍경이다. 이곳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자 길게 팬스를 쳐 놓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팬스에는 조하(潮河)라고 안내판이 붙여져 있다. 인류문화의 발상지와 문화의 꽃을 피운 곳에는 강이 있다. 인도 문화의 젖줄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고 중국대륙의 대하는 황하와 양자강이다. 우리나라는 한강, 낙동강이 있고 경주에는 형산강이 포항을 거쳐 동해바다로 흘러간다. 조선하(朝鮮河)로 불리던 그 강을 지금은 조하로 부른다. 만주족이 북경지역으로 이주하고 나서 이름을 바꿨다. 조선하에서 선(鮮)을 빼고 조선의 조(朝)를 감추기 위해 조수 조(潮)자로 바꾸어 조하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측이 남긴 문헌 자료와 금석문에 분명히 언급돼 있다. 현재까지는 적어도 송나라 때까지는 조하가 조선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선 송나라 조정에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나라에서 편찬한 사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와 왕기공(王沂公)이라는 사람이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에서 북경을 거쳐 요나라의 수도인 영성현(寧城縣)으로 가면서 그 행적을 기록한 '왕기공행정록(王沂公行程錄)'에 조선하가 등장한다. '무경총요'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도 200여년 앞서 편찬한 책이다. '무경총요'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  | | | ⓒ 경북연합일보 | | "… 동북쪽으로 백여하(白璵河)를 지나 70여리를 가면 단주(檀州)에 도달하는데 여기서부터는 점차 산길로 접어든다. 50리를 가면 금구정에 도착하는데 산길로 접어들어 심히 구불구불하고 이후는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하(朝鮮河)를 지나 90리를 가면 고하구(古河口)에 도달한다(過朝鮮河 九十里 北至古河口)……." 여기서 백여하는 현재의 백하를 말한다. 여기서 70여리를 가면 단주가 나온다고 했는데 단주가 바로 현재의 밀운현이다. 이곳에서 금구정을 지나 조선하가 있고 그곳에서 90리를 가면 고하구가 있다고 했는데, 고하구는 바로 지금의 고북구(古北口)다. 고북구는 신석기 시대 이래 북경 북쪽 지역과 내몽골 지역으로 통하던 길목이다. 지금도 북경에서 승덕, 적봉, 영성 등 신석기시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했던 홍산문화지역으로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한다. ◆조선하가 조하로 바뀐 이유 '무경총요' 보다도 조금 이른 시기에 쓰여진 '왕기공행정록'도 조하를 조선하로 기록하고 있다. '왕기공행정록'은 왕증이 송나라의 특사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송나라 변경에서 요나라 수도인 중경, 즉 오늘날 내몽고 영성현까지의 중간 경유지들을 일정표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원나라 말엽의 학자 웅몽상(熊蒙翔)이 당시의 대도(大都)인 오늘날 북경에 대해 기술한 책인 '석진지집일(析津志輯佚)'에도 조선하가 나온다. 이러한 자료들을 보면, 송나라와 요나라 시대를 지나 원나라 때까지는 현재의 조하가 조선하로 불렸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청나라 때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청나라 때 저작인 '흠정열하지'에는 조선하라는 기록은 아예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조하가 등장한다. 이로 보면 공공성 앞을 흐르던 단군조선의 강 조선하가 조하로 바뀐 것은 명·청시대 어디쯤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시대에 와서 조선하를 조하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동북아지역의 정치지형도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송나라와 요나라시대까지만해도 단군조선의 후예인 고려의 행보에 따라 중원의 판도가 좌우될 만큼 강대한 나라였다. 그러나 명·청시대에 이르면 조선은 약화될 대로 약화돼 압록강 이남의 땅을 소유한 작은 나라가 되었고, 중원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 나라의 이름을 가진 조선하가 중원의 수도 근처인 북경 북쪽에 있다는 것은 중국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고 역사적 분쟁을 야기시킬 소지도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한 중원의 수도가 함양·장안·낙양 등 중국의 서쪽에 위치해 있을 때는 오늘의 고북구·조하 일대가 북방 변경이었지만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뒤로부터는 고북구·조선하 일대는 수도의 코앞에 위치하게 됐다. 때문에 조선하란 이름을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서 중국음으로는 동일한 조(朝)와 조(潮)를 교체하고 선(鮮)자를 탈락시킨 조하로 바꿨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성의 공간, 박달촌 공공성과 조선하 말고도 그곳이 단군조선이 출범한 공간이었음을 짐작케하는 지명이 또 있다. 바로 단주(檀州)와 백단촌(白檀村)이다. '밀운현지'에 따르면 단주는 수나라 초(598)에 밀운현성 안에 처음 설치됐다. 그 후 주, 군, 현이 여러 번 설치되고 폐지됐다가 명나라 초기(1368)에 단주가 밀운현이 돼 오늘에 이른다. 그렇다면 백단촌이란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하였을까? 심백강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서한시대에 현재의 하북성 란평현 지역에 백단현이 설치됐는데 현의 명칭은 백단산(白檀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단촌은 조하와 백하가 만나는 지점 안쪽에 위치한다. 이곳이 현재 밀운시에서 가장 일찍 세워진 마을이라고 한다.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이 처음 밀운을 찾았을 때 초행길에 처음 숙박한 곳이 바로 백단촌민위원회와 백단촌당지부 간판을 건 모텔이었다고 한다. 백단은 우리 말 '밝달'의 한자식 표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밝달'이란 지명과 산 이름이 도처에 있다. '밝달'을 신성시 하던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밝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밝달강'으로 부르기도 하고 '조선하'로도 불렀을 지도 모른다. 경주 내남면에도 박달이라는 동네가 있다. 박달리(朴達里)는 박달 뒷산의 생긴 모양이 흰 닭과 같다 하여 옛날에는 백계동이라 했다. 그러던 것이 흰 닭 즉 '밝은 닭'이 박달로 굳은 것으로보고 있다. 흰 닭은 오래전부터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왔다. 신라는 알영부인 설화에 계룡이 등장하고 김알지 탄강 신화에 흰 닭이 등장하며, 여기에서 '계림(鷄林)'이라는 국호가 파생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닭을 나라의 상징동물 국수급으로 신성시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하가 있었고 밝달산이 있었으며 지금도 밝달촌(백단촌)이 있는 그곳, '중국역사지도집'에 박달나무 단(檀)자가 유일하게 들어갔던 단주, 연산산맥이 품고 있는 대 명당(明堂)! 그곳은 먼 과거 조상들이 홍익인간·재세이화를 꿈꾸던 곳이었다. 김희동 기자 khd@kby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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