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두 시기의 삼한시대와 고깔모자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7년 06월 13일(화) 18:59
|
|
 |  | | | ⓒ 경북연합일보 | 신라가 수립되기 전에 존재했던 진한辰韓 선주민先住民의 연원에 대해서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 중국 사서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자신들을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노역을 피하여 마한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최치원 선생의 주장으로서 진한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셋째, '삼국사기'에는 조선의 유민(遺民 ; 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이 산과 계곡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 필자는 선도성모 집단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도착한 후의 이동 경로를 그들이 남긴 유물·유적들의 흔적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추정했었다. 고대 연燕나라 지역에서 발해만을 건넌 월지족이 청천강을 따라 묘향산에 도착한 후 남하하여 대동강 지역에서 어느 정도 머물면서 그 주변을 탐색한 후에 해안선을 따라 서해안을 돌아 남해안을 거쳐 가야와 신라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중간 중간의 기착지에서 삼한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했었다(최치원의 주장과 관련된 부분). 그래서 초기 철기문화의 전파경로가 대동강에서 한강 유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으로 이르는 육로와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 지역으로 파급되는 해로가 있으며, 이 두 계열의 문화가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혼합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자료를 보고도 단순히 탐색의 효율성을 위해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이동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것은 연구 도중 다시 한 번 살펴본 '삼국사기 신라 본기' 박혁거세 38년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읽고서였다.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어 마한을 빙문하니, 마한 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진辰·변卞 두 나라는 우리트 속국인데 근년에 조공을 바친 일이 없으니 사대의 예가 이럴 수 있소?'하였다.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이성二聖(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발흥함으로부터 인사가 닦여지고 천시도 화평하며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공경하고 사양하므로, 진한의 유민(辰韓遺民)에서 변한(卞韓·)낙랑·왜인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없으나...?"하였다. 이 기록을 다시 볼 때 눈에 뜨인 것은 '변한'을 지칭하는 '변'자가 월지족이 머리에 쓰는 프리지안 캡인 '고깔 변弁'이 아니라 '성씨 변卞'이었던 것이었다. 필자는 처음에 오타인 줄 알고 원문을 다시 확인해봤지만 원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 글자가 통용될 수 있는지 자전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우리나라 자전에는 '卞'에도 '고깔'의 의미가 있지만 중국의 자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다른 글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과 '진한의 유민(遺民)'이라는 기록, 그리고 삼한시대 철기문화의 전파경로가 육로와 해로 두 가지였다는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삼한은 월지족이 이주하기 전의 馬韓·卞韓·辰韓(중국 사서에 기록된 진한 선주민)과 월지족이 이주한 후의 馬韓·弁韓·辰韓(신라이자 조선의 유민), 즉 두 시기의 삼한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월지족이 철기문화의 전파경로인 육로와 해로 두 가지 경로로 나누어 탐색작업을 한 것은 탐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까지 마한이라는 강력한 집단이 서해안 지역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
|
|
경북연합일보 기자 - Copyrights ⓒ경북연합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최신뉴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