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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 전설과 서불과차(徐市過此) 석각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7년 05월 16일(화)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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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우리 옛 선조들은 여름의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한반도 명산의 별칭인 봉래, 방장, 영주는 원래 중국의 삼신산 전설에서 비롯된 것인데, '열자列子_탕문편'에는 삼신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발해의 동쪽 수억만 리 저쪽에 대여·원교·방장·영주·봉래라는 오신산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 리,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이 늘어서 있고, 주옥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한다고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들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간다. 오신산은 본래 큰 거북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뒤에 두 산은 흘러가 버리고 방장·영주·봉래의 삼신산만 남았다." 이처럼 중국의 삼신산 이름이 한반도의 명산에 붙여진 것에 대해 혹자는 진시황의 명령에 의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데리고 삼신산을 찾아나섰다는 서불이 그 산들을 다녀간 후에 붙였다고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남해 상주와 제주도에는 서불이 다녀가면서 새겼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혹은 徐市過之)' 석각도 남아 있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서불은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이끌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를 세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서불은 당시 수천 명의 동남동녀와 함께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직접 찾아갔었을까? 오늘날과 같이 한반도의 지형과 지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 당시로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짧은 시간 내에 한반도 전역을 탐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다만 제주도에 있는 서불과차 석각을 고려해볼 때 한라산은 들른 것이 확실하다고 추측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금강산과 지리산에 삼신산의 이름이 붙은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필자는 이미 지난 칼럼에서 신라 금관과 일월오봉도에 이러한 삼신산의 흔적이 상징으로 남아있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한반도 명산에 붙여진 삼신산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즉, 선도성모 집단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한반도 전체를 탐색한 흔적이 삼신산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며, 이처럼 한반도 전역을 탐색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신라 3대 유리왕 때에야 한반도 전역에 대한 탐색을 마치고 비로소 정착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필자가 이처럼 단정짓는 까닭으로는, 기록에 의하면 유리왕때 두 집단의 여자로 나누어서 베짜기 시합을 한뒤에 이긴 집단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놀이를 즐겼는데 이것을 가배라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나오는 '가배嘉俳'는 '가우嘉優'라고도 불렸는데, 설과 함께 오늘날 우리민족의 2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이다. 이 기록에 대하여 어느 역사학자는 '가배'가 유리왕 대에 있었다는 이 기사는 신빙성이 없으며, 훨씬 후대인 통일신라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우'와 '가배'는 둘 다 아베스타어 'gau'와 그 파생어 'gave'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정착'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결국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뒤에 약 90년이 지나서야 정착단계에 이르게 된 것인데, 이처럼 정착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그동안은 그들의 원래 목적이었던 불로초의 탐색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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