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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족의 장례 풍습과 고인돌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7년 01월 17일(화)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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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소설가 김진명은 소설 '글자전쟁'에서 고대를 배경으로 한 살인사건을 통해 '조弔'라는 글자가 생기게 된 배경을 추적하면서 한자가 중국 한족漢族이 아니라 우리 선조가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弔라는 글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들판에 옮겨 놓고 동물들이 시체를 뜯어먹은 후에 뼈를 골라 장사를 지내는 고구려의 풍장風葬 풍습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풍장 과정에서 효심이 지극한 고인의 가족이 동물에 의해 고인의 시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들판에 나가 활을 막대기에 기대 놓고 시체를 지키는 모습에서 이 글자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반면에 풍장의 풍습이 없는 중국의 경우는 상갓집에 수건을 걸어놓는 풍습을 보고 만든 글자인 조吊를 만들어서 조문을 나타냈다는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그밖에 논을 의미하는 '답畓'이란 글자 역시 한국에서만 사용되며, 중국에서는 논을 수전水田 혹은 도전稻田이라고 표기한다. '가家'라는 글자 역시 마찬가지로 집안에서 돼지를 키우는 우리 풍습에서 이루어진 글자라는 것이며, 중국의 대문호 임어당 선생도 안호상 전 문교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한자가 동이족이 만든 글자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필자가 고대사 연구를 하면서 본 메소포타미아 지역 벽화에는 수레에 짐을 싣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수레바퀴의 모습이 수레 '거車'자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물론 이러한 단편적인 단서로 인해 한자 전체를 우리 선조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수레를 나타내는 한자 역시 일종의 외래어로 중국에서 받아들여 만들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김진명이 거론한 몇몇 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 선조들이 만든 외래어의 개념이거나 혹은 소설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당시 중국인들이 한민족의 생활 풍습을 보고 만든 글자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한자의 형성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인 것 같다. 아무튼 소설에서 등장하는 고구려의 풍장 풍습은 조장鳥葬 혹은 천장天葬이란 용어로도 표현되는데, 영어권에서는 주로 천장을 의미하는 'sky buri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티베트에서는 아직 이러한 천장 풍습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장 풍습은 그 기원이 이란인데, 정작 조장 풍습의 기원인 이란의 경우는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970년대에 금지되었다. 그렇다면 티베트는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조장 풍습을 가지게 되었을까? 원래 남부 시베리아 파지리크 지역에 거주하던 아리안 계통인 월지족은 흉노에게 밀려서 서역으로 이동했으며, 대월지는 계속되는 흉노의 공격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는 지금의 인도-파키스탄 지역에서 쿠샨 왕조를 세우게 된다. 반면 소월지는 서역에 남아서 티베트의 선조인 강족羌族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때 월지족의 조장 풍습이 강족에게 전파되었으며, 그 풍습이 바로 강족의 후예인 티베트족에게 전승되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란은 조장을 위해 '침묵의 탑'이라는 삼중 동심원 구조의 벽돌 건축물을 이용했으며, 조장 후에 뼈들을 골라서 독에 담아서 보관했다. 그런데 티베트에는 '침묵의 탑' 구조물이 없는 반면, 시체를 올려놓는 '천장대天葬臺'라는 직사각형 모양의 바위를 이용한다. 1900년대 초에 티베트에서 러시아인이 찍은 천장대 사진을 보면 그 모습이 바로 개석식 고인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개석식 고인돌이란 밑에 고여 둔 고임돌 없이 덮개돌만 있는 양식이다. 즉, 전 세계에서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은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주장해왔듯이 청동기 시대에 힘 있는 지배자들의 무덤이 아니라, 바로 조장을 위한 '천장대' 역할을 하던 바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 옹관(독무덤)이 유행했던 것이었으며, 요동반도를 비롯한 한반도 전 지역과 중국 산동반도, 그리고 일본 규슈에 이르기까지 고인돌과 옹관의 분포가 비슷한 것은 월지족의 한반도 이주 전후 무렵에 그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이준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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