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김영호 논설위원 교육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신라 천년 왕도였던 경주가 요즈음 지진피해와 걱정되는 여진 때문에 문자 그대로 식불감 침불안이다. 맛 좋은 음식을 먹어도 그 진미를 모르고, 자리에 누워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 지진에 기와가 파손되고 담장은 무너지고 벽은 금이 가서 집은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놀란 가슴은 지진에 대한 여운이 속마저 메스껍게 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인명재천이라 하여 하늘만 믿고 살았던 세월이 좋은 때인 것 같다. 이 말도 시대변천에 따라 인명재차라 하여 사람의 목숨이 차에 달렸다고 바뀌더니, 농담이긴 하지만 인명재처라고 남편의 목숨은 아내에게 달렸다고 웃곤 했는데, 그 고귀한 인명도 지진시대에는 인명재진(在震)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일본에서 발생되는 빈도 높은 지진 피해를 보면서 만에 하나라도 우리나라에 그런 지진이 발생한다면 아마도 그 피해는 이웃나라의 그것과는 족탈불급(足脫不及)으로 비교가 안 될 것이라고 가상했다. 왜냐하면 모든 건축물을 긍구(肯構)할 때 지진에 대비한 내진 설계를 하지 않았거나 혹은 완벽하게 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진에 대한 심각한 피해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할 때 고가의 내진설계는 별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5.8규모의 강진이 재정자립도가 낮은 경주를 때렸는데, 고층의 주상복합아파트가 없어서 천만 다행이었으나, 특정지역에 한해 한옥 골기와 집을 짓도록 법적으로 제재했기 때문에 그 지역만 유독 피해를 입게 되었으니 유감스럽다. 박대통령이 피해현장을 살펴보시고 적극 지원하겠다는 말씀을 하셨기에 마음의 안정을 다소 취할 수는 있으나 완전복구에는 시일을 요하기에 불편함은 배제할 수는 없다. 하늘이 하고 땅이 하는 일을 인간이 어찌 마치 투명한 유리를 투시하듯 훤하게 볼 수 없어서 또 언제 어느 정도로 재진이 나타날지는 예견할 수 없는 일이다. 월성원전이 지진 피해를 입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긴 하지만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7.0규모로 보강을 한다니 안심은 되긴 하나, 신라시대에도 경주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여 가옥과 인명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원자력발전소는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무서운 무기처럼 정감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살펴보니 경주에 최초로 지진이 발생한 것은 파사왕 21년 10월이었으며, 그 지진으로 민옥이 쓰러지고 죽은 자가 있었다. 그 후 아달라왕 17년 7월과 내해왕 34년 9월, 기림왕 7년 8월에 경주에 지진이 있었고 9월에는 지진으로 민옥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내물왕 33년 4월과 6월에 경주에 지진이 있었고 6월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성왕 5년 10월과 자비왕 21년 10월, 진흥왕 원년 10월, 진평왕 8년 정월, 문무왕 21년 5월, 경문왕 15년 2월에 경주에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지진이 발생한 빈도는 1월, 2월 및 4월에서 9월까지는 매월 각 1회이고, 10월에는 4회로 가장 많이 지진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효소왕 8년 9월에 동해에 물싸움이 일어나 그 소리가 왕도에까지 들렸다는 것이다. 이 물싸움이라는 것은 해저지진 혹은 해저분화로 인하여 생기는 지진과 진랑(津浪)으로 추측하고 있다. 태종무열왕 4년 7월에는 토함산의 땅이 타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없어졌다고 하며, 선덕여왕 8년 7월에 동해수가 붉고 뜨거워서 고기가 죽었다는 것은 지진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이상과 같은 신라 때의 경주지진에서 보면 10월은 지진의 발생빈도가 높아서 걱정되는 달이다. 보수가 끝나기 전에 또 인명재진이라는 불행이 없도록 정부의 신속한 조치를 바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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