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논설위원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나당전쟁(羅唐戰爭)은 신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옛 고구려 땅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663년(문무왕 3)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형식적이나마 신라를 당의 한 도독주로 삼았다. 특히 평양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두어 삼국을 총괄토록 함으로써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김인문(金仁問) 등의 외교를 통해 최선을 다해 전쟁을 막고자 하였으나, 당나라와의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당나라는 사방의 이민족을 정복하여 커다란 근심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 지배를 지속시키기 위해 실시한 정책이 기미책(羈?策)이다. 즉 점령지의 옛 지배자를 일정기간 동안 온존시키면서 중화문화로 동화시킨 후에 직접지배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기미책은 지금의 거대한 중국을 만든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나라는 동방의 이민족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고구려의 막강한 국력 때문에 8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전쟁, 그것도 신라의 협조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신라도 만만치 않았다. 600년대 이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공격에 시달렸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당나라와의 동맹이 절실하다고 판단하였다. 김춘추는 우선 647년 왜국에 건너가 동향을 살핀 다음, 648년에 당나라로 가서 당 태종과 나당동맹(羅唐同盟)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나당동맹의 내용은 당나라의 대규모 군대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가 군수품과 군량을 조달한다는 것인데, 신라에게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신라 수뇌부의 조약 검토 결과, 당나라에게 막대한 양의 물품과 식량을 제공하면 상황이 어려웠던 신라는 경제가 불안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결국 신라마저 당나라에게 병합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이후 신라는 두 가지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첫째, 신라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신라는 당나라 군대에게 막대한 군수물자와 군량을 공급해야 했다. 이를 김유신이 주관하여 지연작전을 썼다. 이로써 당나라는 고구려를 7차에 걸쳐 공격하게 되어 인적 경제적 소모가 컸다. 반면에, 신라는 경제력 소모를 막아 다가올 나당전쟁을 치룰 힘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나당동맹의 영토획정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였다. 신라와 당나라는 대동강-원산만을 경계로 서로의 영토를 나누기로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를 차지하고 신라마저 계림도독부로 삼아 기미책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 옛 귀족뿐 아니라 고구려 옛 귀족도 포섭하여 장차 있을 원하지 않는 전쟁에 대비하였다. 또한,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나당전쟁은 신라에게 매우 불리하였는데, 그때마다 티벳족이 세운 토번(吐蕃)이 분쟁국인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당군이 본국으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위기를 모면하였고, 실패 원인을 극복하여 당군을 물리칠 시간을 벌었다.
최근에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설치하려는 사드로 인해 국제적으로 문제가 커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중국의 공산화 위기에 대한 전략으로서 미국은 댜오위다오[釣魚島]를 일본령으로 만들어 영토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패권적인 전략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일 뿐이다. 사드 설치가 단순히 북핵에 대응하는 정도를 넘어선다면, 대한민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에 대해 김유신이나 서희와 같은 위기 극복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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