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최형대 논설실장 사회복지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민족의 명절인 추석 즉 한가위가 며칠 후로 다가오고 있다. 추석이 되면 나름대로 온 집안이 연례적으로 치러오는 여러 가지 의례 때문에 바빠지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의례가 조상에 대한 차례와 조상 산소에 대한 벌초이다. 시대사상과 시대환경에 따라 장묘문화도 연동 적으로 많은 변천을 해 왔다. 우리나라는 유학과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상숭배가 사상의 기반이기에 매장문화의 인륜적 의례 화는 조상 섬김을 인간도리의 핵심기초로 여기어 실천하여오고 있었다. 여기에다 조상의 음복(陰福)에 대한 속설과 기대감이 숭조실천을 더욱 강화시키는 중심요인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매장으로 묘소를 만드는 장례법은 토질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난한 지역에서 일반화되었다. 날씨가 춥거나 기후가 건조하고 토질이 척박하며, 혹은 땅이 얼어 죽은 자의 신체가 자연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지역은 조장, 풍장, 수장 등과 같이 그 지역 환경에 적합한 장례방법으로 죽은 자의 신체를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우리나라는 환경보다는 죽은 자에 대한 심적 태도나 사회문화의 양상에 따라 장례법도 달라져왔다. 삼국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목곽묘, 옹관묘, 적석총 등의 매장이 일반화되어 오다 불교의 도입과 사회화로 화장제도가 점차 퍼져나갔다. 삼국시대의 불교식 화장은 약 7C 경으로, 불교와 함께, 중국에서 유행되던 화장묘(火葬墓)가 삼국으로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록상 신라에서 최초로 화장한 인물은 고승 자장(慈藏, 590-658)으로 "강원도 정암사(淨巖寺)근처에서 문수보살을 기다리다 그 자리에 쓰러져 입적하자, 다비(茶毘)하여 그 유골을 석실(石室)에 안치 하였다" 란 기록에 의하면 화장 후 봉안의 절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화장 문화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한 고려시대에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져오다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조선이 국가의 모든 제도를 성리학에 바탕을 두게 되자 장법도 변화하게 되었다. 조선은 신진 사대부들이 기용과 함께, 의례(儀禮)와 관련된 사항은 대부분 주자의 가례에 따라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의 주검을 화장(火葬)이나 수장(水葬)으로 처리하면 비록 망인(亡人)의 유언이 있더라도 장(杖) 백 대로 다스렸으며, 스님들도 일반인과 똑같이 규제하는 등, 화장 의례를 금지시켰다.
조선 초기에는 다비가 여전히 성행하여 사대부들도 화장을 많이 하였으며, 심하게는 이차 장의 하나로 산골(散骨)도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성종 23년(1492) 도첩제(度牒制)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막는 등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강력히 시행하면서 화장은 거의 막을 내리고 주자가례에따른 매장이 일반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은 경쟁과 경제성의 시대이다 보니 여유와 절차는 효과와 효율이라는 가치에 의하여 밀려나면서 화장이 점점 더 일반화되어가고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다 정부의 '국토의 효율적 이용은 물론 국민의 보건위생상 위해(危害)를 방지하고 공공복리 증진에 이바지 한다' 는 목적의 화장장려 정책이 추석의 전통적 모습을 변화시켜가고 있다. 그래도 조상의 묘소의 위치를 알고 조상에 대한 은혜를 아는 이는 추석 이전까지는 벌초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날을 잡아 연례적인 벌초를 한다. 가족 간이나 집안 대소가들이 모여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와 친족들의 소식을 주고 받으며 함께 작업을 한다. 예초기의 엔진소리가 산천을 울린다. 어떤 이는 열심히 예초기로 풀을 깎아내고, 또 어떤이는 갈고리로 벤 풀을 걷어낸다. 조상님들은 천지가 진동할 듯한 예초기 소리에 얼마나 놀라실까 싶지만 효율과 경제성의 맹신자가 되어버린 후손들은 풀깍기에만 전념할 뿐이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견함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기도하고 조상에 대한 혈육의 동질감과 고마움의 마음도 가져 보기도 한다. 훗날 벌초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많은 교훈을 던져주기도 하는 전통문화임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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