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문무학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민족의 자랑스러운 정형시 시조의 큰 별, 백수 정완영 시인이 지난 27일 오후 3시 별세했다. 향연 98세. 호 백수(白水)는 그의 고향인 김천(金泉)의 '泉' 자를 파자하여 '白水'라고 한 것, 필자는 그냥 '맑은 물' 로 풀고 싶기도 하지만 평생 고향을 사랑하리라는 다짐 같은 것이 서려있기도 하다. 오늘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 김천에 돌아와 묻힌다. 1919년 11월 11일 경북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2005년에 발간된 정완영 시조전집 『노래는 아직 남아』의 연보에 1941년 시조 창작 관계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 받았단 기록을 보면 그의 시조 창작 기간만 75년이 된다. 공식적으로는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 당선, 6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골목길 담 모롱이' 입선,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 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 데 /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조국- 전문
1974년 고등학교 3학년 국정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 외도 1983년 초등 5학년 교과서에 '분이네 살구나무', 1984년 중등 1학년 교과서에 작품 '부자상(父子像)'이 실리기도 했다. 한국시조시인협회장과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오로지 시조와 함께 일생을 같이했다. 그가 부른 노래는 3000여 편이 넘는데 그 모두가 겨레의 혼이고 민족의 흥이었다. 그의 이런 공적은 각종 문학상을 비롯하여 1995년 금관문화훈장 수훈으로 빛났다. 뿐만 아니라 1996년에는 제주도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고, 2005년에는 '경상북도를 빛낸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8년에는 백수문학관이 김천 직지 문화공원에 건립되었고, 지난해부터 그를 기리는 백수문학상이 제정되어 제1회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결코 적지 않은 연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계가 서럽게 느껴지는 것에도 큰 까닭이 있다. 온갖 문화가 서구의 것에 물들어 우리 것 하나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풍토에서, 정치도 고함도 아닌 오로지 작품으로만 민족의 정신을 지켜온 그 순정한 정신 때문이다. 그가 가고나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을까 캄캄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시조만을 쓰고 그가 부른 노래들은 바로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가 되었다. 그의 시가 초 중 고 교과서에 두루 실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빚은 노래가 민족의 숨결, 그것의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어느 작품이라도 읽으면 그가 우리 민족의 언어를, 우리 민족의 정신을 얼마나 온전히 가꾸려 했는지 설명 하나 보태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시조의 큰 별 백수 정완영, 그는 비록 떠나도 그의 높은 정신과 아름다운 가락은 이 땅에 오래 남아 우리를 우리답게 할 것이다. 명복을 빌며 '부자상'을 함께 읽자.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드릴 제 마음 없아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 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린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날 그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부자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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