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5월에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의 석장사 절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냇돌의 반질반질한 면에 글자를 새겨 지금도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임신년[612년, 진평왕 34년 무렵]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3년 이후에는 충도(忠道)를 계속 유지하여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약에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611년] 7월 22일에도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는데 3년만으로 맹세하였다.”
신라에서 유교경전을 정식으로 교육한 기관은 국학(國學)인데, 651년 진덕여왕 에 설치되었다. 비문의 내용에서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을 걱정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보면, 고구려 백제가 신라를 쳐들어오기 시작한 610년대인 진평왕 때에 맹세한 것이다. 임신서기석에 두 친구가 스스로 유교경전을 3년만에 깨우치겠다고 함에서,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미 신라 사람들은 그 경전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문에 보이는 유교경전은 신라 사람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상당히 높은 유교적 소양을 배워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특히 충성의 도리를 배우려 한 점은 위기에 직면한 신라국가를 위해 봉사하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평화로운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통일신라는 청소년들에게 충효사상을 함양시켜 율령국가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던 것이다. 또한 화랑들은 사회의식도 잘 함양되어 힘을 합쳐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던 화랑 김경응은 헌안왕의 사위가 되어 경문왕이 된 사실도 유명하다.
특히 비문내용 중에 충도의 실천을 맹세한 점은 바로 이것이 화랑도의 근본정신인 세속오계(世俗五戒)와 관련이 깊다. 즉 진평왕 때에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귀산(貴山)·추항(箒項) 두 화랑에게 계율로 주었는데, 사군이충(事君以忠)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설치하였는데, 그때는 신라가 영토를 2배 이상 크게 팽창하고 있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재와 도교·불교 외에 유교사상이 더욱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진흥왕은 유불선(儒佛仙)을 함양한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화랑들이 여럿이 어울려서 전국 명승지를 찾아 심신을 단련하고[仙], 살생유택(殺生有擇)과 같이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고[佛],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儒]. 바로 임신서기석은 신라 융성기인 진평왕 때에 청소년들의 강렬한 유교적 실천사상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화랑들은 스스로 유교적인 소양을 공부하기 위해 벗과 함께 맹세하여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사교육 중심의 교과목 공부에만 전념하여 자연을 벗삼거나 효성이나 충성심을 배워 국가사회 공공의식은 제대로 함양할 기회가 없다.
청소년기에 필자는 똑똑한 친구가 있어 그와 함께 공부하고 관찰하여 많은 것을 배워 역사연구자가 되었다. 그 친구는 나한테서 의리나 신뢰를 배웠다고 하여 나를 감동시켰다. 화랑의 예와 같이 혼자보다 함께하는 공부는 아담·스미스의 분업론처럼 매우 효과적이다. 중국의 옛기록에 의하면 동이족은 세 사람이 먼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즉 서로가 스승이 된다는 뜻]고 부러워했다. 요즘 막 개학한 청소년들도 여럿이 어울려 함께하여 서로 배우고 우정과 추억을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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