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김영호 교육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국가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문과에 급제하거나 사마시에 입격하던지 혹은 무과에 합격해서 보직을 받아야 국가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려면 무엇보다 귀속적 요인이 중요하고 총명한 재능을 타고나서 훌륭한 선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야 했다.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직을 바르고 청렴하게 수행하여 청백리라는 자랑스러운 보상을 받기도 하고, 부정한 정사를 펴서 탐관오리가 되어 향민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안타깝게도 해직을 당하는 불명예를 남기기도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만인이 부러워하는 교지를 받고 직위와 직책을 부여 받아 향민의 추앙을 받으며 승승장구 승진하다가도 우연 득병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종생하여 세인을 슬프게 한 사례가 없지 않았다.
귀봉 권덕린공은 조선시대 경주가 낳은 영특한 이질(異質)을 타고난 인재로서 약관인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병조정랑 예조정랑을 거쳐 회덕현감과 하동현감, 예천군수 및 합천군수를 역임하고 곤양군수의 교지를 받고 모부인을 모시고 함께 임지로 가던 부임길에 우연 득병하여 안타깝게도 45세에 세상을 떠났던 관료였다. 오늘날 까지도 향민과 유림들이 귀봉을 칭송하는 것은 공의 탁월한 총명과 멸사봉공의 정사이념 및 보본과 사은절의(師恩節義)가 남다르게 투철하였기 때문이다. 귀봉 권덕린공의 유사에 의하면 송곳 보다 자루가 먼저 튀어 나올 만큼 재능이 남보다 뛰어나 일반아이와 달랐는데, 불행하게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이게 되어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으나 모부인이 자애로써 가르치고 배움을 독려하였기 때문에 8, 9세 때부터 글을 읽고 지을 수 있었다.
어린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귀봉이 배우고 익힘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연마하는지 살피게 하였다. 만약에 하루에 성취해야 할 부분을 다하지 못하면 종들이 살피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노복에게 대신 벌을 주어 귀봉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였다고 한다. 유년기를 지났을 때, 모부인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입문케 하여 귀봉은 심오한 학문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회재 선생은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귀한 하여 자옥산 초막에서 성리학에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귀봉으로 하여금 저명한 학자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 안목은 맹모삼천의 대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진다.
특히 회재 선생이 그의 종매로 하여금 귀봉의 배필이 되도록 하였다는 것은 인간적인 품격과 우수한 재능으로 학업에 남다른 성취를 이룩하여 촉망되는 선비가 될 수 있는 자질이 발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귀봉이 합천군수로 재직할 때 상을 입은 질 사악에게 보낸 서(書)를 살펴보면 조카의 외롭고 괴로운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주는 깊은 정이 보이며, 초종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제수와 절차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마치 마주 앉아 일러주는 말씀 같다.
조문객에 대한 지나친 접대는 예(禮)가 아님을 밝힌 것과 칭가유무라 하여 집안 형편에 따라 있고 없음에 맞게 치상을 하도록 일러 준 것과 특히 군수라는 직권으로 장례를 수월하게 치루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을 보낼 수 있지만 사가의 상사에 '백성의 힘을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법이 아니다'라고 공사를 명확하게 구분한 정사이념과 깨끗한 품성과 너그러운 덕으로 향민을 다스린 것은 은사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청렴과 공평을 숭상한 것이었으며, 특히 옥산서원을 창건하여 향례(享禮)를 봉행한 사은절의 등은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교훈적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