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논설위원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임진왜란이라 하면 바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사에서는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대해 여러 가지 용어로 부르고 있다. 국가간의 전쟁으로 보는 임진전쟁(壬辰戰爭) 및 조일전쟁(朝日戰爭), 도자기전쟁 등으로 부른다. 일본사에서는 당시의 연호(年號)를 따서 분로쿠게이초[文祿慶長] 또는 분로쿠의 역[文祿の役]이라 하며, 중국사에서는 당시 명나라 만력제(萬曆帝)의 호를 따서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 혹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한다. 임진왜란에 대한 각각의 용어들을 살펴보면, 어처구니없는 자기중심의 모순이 깔려 있다. 흔히들 부르는 임진왜란이란 왜놈이 분탕질을 했던 소규모 싸움으로 보려는 과소평가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그 후에 국가적인 변동이 일어나 민생이 엄청나게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일전쟁이나 임진전쟁이란 그런대로 그 규모나 의미를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더욱이 도자기 전쟁이란 용어는 16세기 당시 일본에서 다도(茶道)가 크게 유행하면서 도자기가 매우 부족하였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전쟁을 문화교류라는 시각으로 낭만적인 용어로 부를 수 있을까. 일본사에서는 당시 고요제이천황(後陽成天皇)의 연호인 분로쿠 및 게이초 동안에 일어난 전쟁으로 하여 그런 용어로 부르고 있다. 전역이라는 용어는 승리감의 표출로서 당시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전쟁 중의 만행에 대한 객관적 역사인식이나 역사적 양심조차 들어가 있지 않은 뻔뻔함의 어리석음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중국사에서도 더욱 가관이다. 중국사에서 부르는 만력조선의 전역이란 용어는 당시 명나라 제13대 황제로서 만력제(1563~1620 재위)의 칭호를 따서 부르는 것이다. 더욱이 항왜원조라는 용어는 명나라가 궁지에 몰린 조선을 원조하여 일본과 항거하여 싸웠다는 의미이다. 이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전쟁 초기엔 조선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쳐들어오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전쟁의 본질을 전혀 개의치 않는 뻔뻔함을 드러내고 있다. 1592년 임진년의 전쟁은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갈등에 뿌리를 둔 것이므로, 조선에서 일어나야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외교 기조는 쇄국정책이었다. 명나라는 본래 일본국왕이 아닌 지방의 호족(豪族)인 다이[大名]들이 하는 조공무역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10년에 한 번씩 조공하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고, 무역장소도 절강성 닝보(寧波)로 한정했다.
명나라는 점차 늘어나는 일본 상인들에게 감합부(勘合符)를 발부하여 명일무역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한편으로는 민간교류가 있었으나,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가 크게 들끓게 되어 명나라에게는 북쪽 오랑캐와 함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즉 명나라의 멸망원인인 북로남왜(北虜南倭)였다.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숨은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 정벌을 꾀했으나, 조선을 거쳐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게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였다. 조선측에서는 이를 우습게 보고 묵살하다가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것은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고 자신과 직결된 전쟁이었으므로, 자기 나라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이후 우리와 무관한 청일전쟁이 터져 한반도는 다시 강대국의 전쟁놀이터가 되었고 결국 망국이라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이웃나라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최고의 안보이다. 역사상 강대국끼리 싸우길 꺼려하고 약소국을 부추겨 전쟁터로 만드는 속성이 있어왔다. 연일 논란인 사드가 걱정거리로 안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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