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논설위원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다음 주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조선은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지 40년만에 한민족은 해방되었다. 1856년 일제는 미국에 의해 강제로 문호개방을 당하고 일제의 문명개화파를 중심으로 무능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타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왕정을 복고하여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 등의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확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천황 중심의 역사관인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만들면서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이 한국사 왜곡작업이며 가장 먼저 왜곡한 것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그리하여 왜가 4세기 중엽 369년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중국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기득권을 가졌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일제는 369년부터 562년 대가야 멸망 때까지 이미 조선을 지배한 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운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자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은 일제를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그 이유는 라이벌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일제가 그 역할을 해주기를 꾀했던 것이다. 일제는 체계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까지 밀어붙여 사실상의 지배를 관철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제국주의 지배에는 역사의 사실이 매우 중요하였다. 일제는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일제가 그들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왜곡된 역사관 중의 하나이다.
그 근거는, 첫째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49년(369)의 가야 7국 및 4읍 평정기사, 둘째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 셋째 중국 「송서」 왜국전에 신라·임나·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는 왜 5왕의 작호, 넷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는 칠지도 등이다. 이에 대해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연구를 추구하여 이들 근거를 비판해왔고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첫째의 신공기 기록 비판은 670년부터 사용된 일본이란 국호는 모순이며 정벌 장군의 목(木)씨 성은 백제인이다. 더욱이 임나일본부란 가야에 왔던 왜국의 사신이라는 용어로 밝혀졌다. 둘째의 광개토왕릉비문은 당시 일본 참모본부의 계획에 의해 석회를 도포하여 조작했으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 셋째 왜왕의 안동대장군과 대가야 국왕의 보국장군과 동급이므로 지배관계라고 볼 수 없다. 넷째 칠지도의 명문 내용에서 제후왕에게 '마땅히 드린다'[宜供貢]는 표현은 백제왕이 신공왕후에게 헌상한 것이 아니라 하사한 것이다.
21세기에 와서 일본은 극우파에 의해 왜곡된 역사교과서가 국제적으로 비난을 당하자 이를 재검증하고자 하였다. 필자도 3년간(2005년~2008년) 그들의 조사에 동참하였다. 바로 전라도 지역의 전방후원분 등의 유적조사였다. 그 결과 전라도 지역의 왜계무덤은 1대에만 사용된 것이므로, 왜인이 전라도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1980년 이후에 발굴된 동래복천동의 가야무덤에서 밝혀졌듯이 군사문화의 수준이 낮은, 그것도 가야문화를 배우고 있던 왜국이 가야를 정복했다는 주장은 허구다. 이 연구를 근거로 2008년 8월 일본 총리는 임나일본부설을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왜곡의 망령은 교과서에 다시 등장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한일합병의 단초가 바로 임나일본부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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