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이희용 연합통신 기자 | | ⓒ 경북연합일보 | |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6년 8월 3일. 베를린 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결승 경기가 치러질 메인 스타디움 트랙에 건장한 체격의 흑인 선수가 들어섰다. 그는 출발의 총성과 함께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결승선에 들어섰을 때 그의 앞에 달린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기록은 10.3초. 이튿날 멀리뛰기 결선에서는 8m 6㎝를 뛰어 금메달을 목에 건 데 이어 다음날 200m에서도 20.7초 만에 결승 테이프를 끊어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8월 9일에는 400m 계주 결승에서 동료들과 함께 39.8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역대 올림픽 최고의 스타이자 미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주인공은 미국 앨라배마에서 흑인 노예의 손자로 태어난 제시 오언스였다. '검은 탄환' 오언스가 베를린에서 이룩한 육상 4관왕의 신화는 48년 뒤에야 미국의 칼 루이스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재현했다. 오언스의 걸출함은 단순히 올림픽 금메달의 숫자에만 머물지 않았다. 예선과 결승을 포함한 4종목 12회의 레이스에서 올림픽신기록 9개, 세계신기록 및 타이기록 4개를 수립했다. 1935년에 세운 8m 13㎝의 멀리뛰기 기록은 25년간 깨지지 않았다. 베를린 올림픽은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꾸민 이벤트였다. 그에 앞서 유대인의 참가를 막으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각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히틀러의 노림수를 흑인 오언스가 보기 좋게 깨부순 것이다. 오언스는 베를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정작 조국인 미국에서 영웅의 귀환을 맞은 것은 여전한 인종차별이었다. 축하 퍼레이드를 마치고 호텔 환영식장에 들어갈 때는 정문 현관 통과를 제지당했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백악관에 초청하기는커녕 축하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미국육상연맹도 매년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주는 설리번상을 1935년과 1936년 연속 다른 선수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오언스는 학업도 일시 중단해야 했으며 말, 개, 오토바이 등과 달리기 경주를 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근대 올림픽은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백인들만의 잔치로 출발했다. 2회째인 1900년 파리 올림픽에 아시아 국가로는 인도가 처음 참가한 데 이어 1908년 런던 올림픽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참가했으나 두 나라 모두 그때까지 영국 식민지였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는 '인류학의 날' 특별 행사를 한답시고 아메리칸 인디언 수족,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족, 아프리카 피그미족, 필리핀 모로스족, 일본 아이누족 등을 초청해 진흙탕 싸움, 장대 오르기 등의 경기를 시키며 소수민족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이 대회는 흑인이 정식으로 출전한 첫 대회였다. 육상 남자 200m와 400m 허들에서 동메달을 딴 미국의 조지 포지가 최초의 흑인 메달리스트로 등재됐다.
비록 일본 대표팀의 일원이었지만 한국인이 처음 출전한 올림픽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였다. 김은배·권태하 선수가 마라톤에서 각각 6위와 9위에 랭크됐고 복싱의 황을수는 1회전에서 판정패했다. 6일 오전(한국시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막을 올린다. 24개 종목 204명의 선수가 태극 마크를 달고 조국의 명예와 개인의 영광을 위해 4년 동안 준비한 기량을 펼칠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다문화가정 출신과 귀화 선수도 있다. 남자 골프의 기대주 안병훈 선수는 탁구 스타 커플 안재형-자오즈민 부부의 아들이다. 자오즈민은 중국 국가대표 출신으로 1989년 안재형과 결혼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탁구 여자 단식과 단체전에 출전할 전지희는 중국 청소년국가대표를 지낸 뒤 2008년 한국에 건너와 선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2011년 귀화했다. 사격 여자 50m 소총 3자세의 장금영 선수는 2004년 한중 사격대표팀 교류 행사 때 한국을 찾았다가 진행요원이던 김대경 영등포중 사격코치를 만나 사랑에 빠져 2006년 5월 결혼했다. 이듬해 남편의 권유로 다시 총을 잡아 태극 마크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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