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문무학 논설위원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짧다.' 라는 형용사를 많이 만나는 계절이다. 거리에 나서면 온통 짧아서 민망한 풍경이 펼쳐진다. 민망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나이 탓인가 싶기도 한데, 짧아도 너무 짧아서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민망한 짧음을 만나지 않으려면 이 너무나 더운 여름이 짧아야 되는데 이 계절도 왠지 그리 쉬 물러날 것 같지도 않다. 밤이 되어도 열기가 조금도 누그러들지도 않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시쳇말로 연설이 짧은 것과 치마 길이 짧은 것을 좋다고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게 짧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민망하거나 성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문학계에 짧은 바람이 불고 있다. 소설에서 장편(掌篇)소설, 길 장(長)이 아니라 손바닥 장(掌)을 쓴 장편소설.
또 다른 말로는 소설의 길이가 나뭇잎 크기 정도라고 하여 잎 엽(葉)자를 써서 엽편소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소설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그것.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으로 치달아 가고 있는 시대, 남의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것으로 절대 만족할 수 없고, 내가 직접 뛰어들어 뭐든지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시대, 짧은 소설로 영상 문화에 매몰되는 문자 문화를 지켜보려는 안간힘인가? 아니면 책 안 읽는 시대, 길이는 짧고 여운은 길고, 재치와 기지, 게다가 상상력과 경이로운 결말까지 있으니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장르라는 논리인가? 소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도 짧음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과 함께 한국 시집 역사의 오랜 전통을 보여주는 창비 시선이 400호 기념 시집으로 짧은 시를 묶어 내놓았다. 짧음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SNS 시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손바닥 소설이라고 하듯이 시도 '손바닥 시' 라고도 하고 길이가 짧다고 '한 뼘 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집을 역은 이들은 "난해해진 시를 읽게 되는 난감함에서 조금이나마 놓여나 독자들이 가능한 한 여유롭게 시와 마주 앉기를 바라는 마음" 이라고도 하고, "길지 않으나 오래 마음을 흔들어 일렁이게 하는 아름답고 따스한 시편" 이라고도 한다. 시에서 멀어진 독자를 불러오려고 하는 안타까움이 넘쳐흐르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짧으면 읽힐까 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수준으로도 시와 소설을 길이를 따져 평가할 수는 없다. 문학 작품의 길이와 감동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짧아도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 있고, 길어도 감동을 얻을 수 없는 작품도 있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문화 양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문화의 흐름을 두고 본다면 문학 작품의 길이가 짧은 것이 긴 것보다는 대하기가 훨씬 쉽기는 할 것이다. 짧으니까 읽는다는 사람도 생길지 모르고…
그러나 문학 작품은 아무리 짧은 것이 대세인 시대라 해도, 그 짧음이 재미에 그치고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면 문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짧든 길든 감동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동을 생각으로 이어주지 못하는 시와 소설을 문학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것이다. 시대가 변하는데 문학이 생각만 고집하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문자 문화가 생각의 틈을 조금도 주지 않는 영상 문화에 자리를 다 내줘서는 안 된다. 세상이 달라지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짧게 읽고, 긴 생각 할 수 있다면, 짧음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