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논설위원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헌덕왕(憲德王)은 신라 제41대 왕으로 이름은 김언승이며 헌덕은 시호이다. 신라 하대(下代) 왕조를 개창한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인겸태자이다. 제39대 소성왕의 동복아우로, 김수종(제42대 흥덕왕), 김충공(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 김제옹 등의 동생이 있었다. 삼촌인 예영태자의 딸인 귀승부인을 왕비로 맞이하여 아들을 두었다. 헌덕왕 즉 김언승의 경력을 보면, 원성왕 때에 794년에 사촌형 김숭빈과 교체되어 시중(侍中)이 되었다. 796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800년에 형인 소성왕이 2년도 되지 않아 죽고 조카인 애장왕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병부령과 상대등의 직위에 있으면서 섭정하였다.
그러나 807년 애장왕이 스무살이 되어 친정을 펴자 김언승은 섭정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점차 왕권이 강해지고 권력에서 소외되어 감을 느낀 김언승은, 809년에 동생인 김제옹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애장왕을 시해(弑害)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다른 동생들은 쿠데타를 거부하였는데, 특히 김수종은 애장왕과 처남매부 사이여서 반발하였다. 그 이유는 할아버지 원성왕이 강력한 군사력과 위계(僞計)를 써서 왕위계승후보자 김주원을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았던 전력이 있었으므로, 손자마저 불법으로 왕위를 차지하는 것은 왕실이나 국가의 미래로 보아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헌덕왕은 동생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사촌형 김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정국을 수습하려 하였다. 때마침 810년에 당나라 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신으로 승려 충허(沖虛) 등과 함께 4촌 김헌정을 당나라에 보내었으나, 차마 쿠데타의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과거에 당나라 태종은 고구려 신하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허수아비 보장왕을 세웠을 때, 커다란 전쟁을 일으켜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780년 혜공왕(惠恭王)이 외사촌 김양상과 김경신[원성왕]에 의해 시해당하여 당나라와 외교적으로 마찰이 있었고, 이번 애장왕의 시해사건까지 양국관계는 다시 굳어질 수 있었다. 승려 충허 등의 사전 노력을 통해 812년에야 당나라에 애장왕의 죽음을 알렸다. 이에 대해 당나라는 사태를 인정하였지만, 과거에 신라를 군자국(君子國)으로 보는 인식이 바뀌었다. 뒤이어 급찬 숭정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내 그쪽의 정세를 살피기도 하였다. 819년에 당나라 헌종이 이사도(운주절도사)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신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니, 헌덕왕은 3만의 병사들을 보내고 막대한 국방비를 들여 적극 협력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그러나 신라 왕실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헌덕왕은 아들을 태자로 삼아 정상적인 왕위계승으로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때 동생 김충공이 정략결혼을 통하여 많은 지지세력을 얻고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었다. 헌덕왕은 자신과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올곧은 김수종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태자를 보필하게 하였다. 김충공의 막내딸 정교를 태자와 혼인시켜 친선관계를 만들어 두 동생의 협력을 얻어내는 대신 서로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두 삼촌은 서로 협력하여 태자를 제거하고 아들이 없는 김수종이 먼저 왕이 되었다. 김충공이 사망하자 약속대로 그 아들 김명(민애왕)이 즉위하고자 하였으나, 다른 왕족들이 서로 왕이 되고자 처절한 내란이 일어나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영약한 정치인이나 지식인은 역사에서의 잘못을 나쁘게 악용하여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크나큰 피해를 입히게 되는 불명예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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