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이희용 연합통신 기자 | | ⓒ 경북연합일보 |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6년 8월 3일 아침.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이던 조선의 왕세제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은 휴가지 별장에서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을 집어 들었다가 자신의 약혼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란다. 자 상대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 1901∼1989)였다. 이 보도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매일신보(每日申報)에도 같은 날 똑같이 실렸다. 이방자 여사(마사코)도 훗날 자서전에서 "신문을 보고 내 약혼 사실을 알았다"고 술회했다. 매일신보가 도쿄발로 보도한 것을 보면 고종(1852∼1919)과 순종(1874∼1926)도 영친왕의 약혼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영친왕은 황태제로 책봉된 지 넉 달 만에 10살의 나이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친왕이 귀족학교 가쿠슈인(學習院) 중등과를 거쳐 육사에 입학,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고 황족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 것은 일제 식민통치 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본의 황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도쿄의 영친왕 저택에는 연일 투서와 협박 전화가 날아들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은 영친왕에게 '구녀(仇女·원수의 여자)를 취한 금수(禽獸)'라고 질타했다.
4년 뒤인 1920년 4월 28일 열린 결혼식에서는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도쿄 유학생이 신부가 탄 마차에 사제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는 이듬해 아들 진(晉)을 낳았다가 1922년 첫 방한 때 '독살 의혹' 속에 생후 9개월 된 아들을 잃는다. 그로부터 10년 뒤 아들 구(玖, 1931∼2005)를 얻는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도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지만 이 둘의 결혼을 쓸쓸히 지켜보는 비운의 여인이 또 한 명 있었다. 1907년 황태제비로 간택돼 결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민갑완(1897∼1968)이었다. 그는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이 결정되자 1918년 초 금반지를 비롯한 패물을 도로 빼앗기고 파혼을 당했다.
그의 부친인 민영돈은 그해 안으로 딸을 출가시키겠다는 서약서까지 써야 했으나, 민갑완은 황태제의 정혼녀라는 자존심을 지킨 채 숱한 청혼을 뿌리치고 죽는 날까지 홀로 살았다. 조선 황실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종의 늦둥이로 태어난 영친왕의 이복동생 덕혜옹주도 재한 일본인이 다니던 일출 소학교를 졸업하고 13살이던 1925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가쿠슈인에 입학했다. 한일 양국의 따가운 눈길을 피하고자 공부에만 전념했던 영친왕과 달리 덕혜옹주는 이복오빠 순종과 생모 양귀인의 잇따른 죽음, 일본인들의 핍박 속에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다. 덕혜옹주 역시 일제의 명령에 따라 쓰시마(對馬)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1931년 5월 8일 결혼했다.
당시 신랑의 얼굴을 삭제한 채 실은 조선일보의 결혼식 사진이 분노한 식민지 백성의 민심을 잘 말해준다. 덕혜옹주는 이듬해 딸 정혜를 낳았으나 죽는 날까지 조현병에 시달렸다. 1955년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이듬해 딸이 유서를 써놓고 실종되는 아픔도 겪었다. 덕혜옹주의 비극적 삶은 연극·TV드라마·소설로 선보였으며, 영화로도 꾸며져 영친왕의 약혼 발표가 신문에 실린 지 꼬박 100년 뒤인 오는 8월 3일 개봉된다. 일의대수(一衣帶水)란 비유가 낯설지 않을 만큼 한국과 일본은 선사시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삼국유사에도 연오랑세오녀의 전설이 수록돼 있고, 가야인과 백제인은 일본의 고대문화를 꽃피웠다. 백제 왕실과 일본 왕가가 혈연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은 일본 아키히토(明仁) 일왕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국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강제로 이뤄진 조선과 일본 황실의 결혼은 당사자들의 불행에만 그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식민지 백성이 모멸감과 열패감에 치를 떨었고, 한일융화(韓日融和)라는 미명과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허울 아래 수탈과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1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전제군주도 없고 귀족도 없어 예전과 같은 정략적 국제결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경의 장벽 완화와 교류의 증가 속에 국제결혼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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