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논설위원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고려는 후삼국의 분열을 통합하여 통일왕조로 출발하였다. 이 시기 고려 주변의 동아시아 정세는 고려를 중심으로 중국 왕조와 북방 유목국가가 3개의 솥발처럼 버티고 있던 정치(鼎峙)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당나라가 몰락한 이후 60년간 5개의 왕조와 10개의 지방정권이 난립하다가 고려보다 늦게 송나라가 통일하였다. 또 거란·여진과 같은 북방민족들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은 혼란기로서 고려에 미치는 위협은 없었다. 고려는 동아시아 세력의 변동이라는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였으므로, 이웃의 힘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힘겹지만 슬기롭게 대응해 나갔다. 그리하여 고려는 국가를 지키고 국익을 크게 하며 국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행되었다.
한족(漢族)이 세운 송나라는 국방력이 약하여 주변 이민족의 위협을 이겨내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에 송나라는 고려와 군사동맹을 맺고 거란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송나라와 문화교류나 경제무역에만 주력하였다.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만 전개된 영토분쟁이므로 끼어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송나라는 고려와 국교를 끊었다 회복했다를 반복하였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거란은 중국대륙을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배후에 있는 고려가 내심 껄끄러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을 맺고 있으므로 거란이 송나라를 공격할 경우 고려가 자기를 협공할 걱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고려는 거란의 첫 침공 때에 송나라에게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서희의 외교로써 전쟁은 종식되었다. 고려는 거란과 3차례의 전쟁에서 독자적으로 승리를 이끌어 위기를 극복하였다. 거란도 고려의 국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서로 친선을 맺게 되었다.
고려의 교류관계는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중국 송나라와는 선진문물의 입수에 있었고, 북방 이민족과는 경제적 이익 획득이었다. 먼저 고려와 송나라는 조공무역보다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도 고려와 무역을 하여 해상실크로드가 구축되었고 코리아(Korea)와 고려인삼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라말부터 받아들인 중국의 청자 제작기술은 아라비아 연금술의 도입으로 독창적인 안료를 개발하게 되어 고려청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고려는 북방의 요·금·원과도 무역이 활발하였다. 조공무역의 일종인 사행무역(使行貿易)은 사신이 오갈 때 수행원들에 의해 행해진 무역이다. 정기사행보다는 임시사행이 많았으므로, 양국 관계는 정치적인 목적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고려의 국제관계는 세력균형을 유지한 위에서 무역을 통해 국력을 신장 유지시켰으므로 수십만 외적의 침략을 막아낸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를 배치한다는 정책에 대해 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한국은 G2(兩强) 즉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 미국측은 일본과의 긴밀한 동맹관계 속에서 신흥 중국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이틈에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사적 재무장을 획책하고 있다.
중국측은 남중국해 등의 영토확장을 꾀하여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북한은 한때 중국과의 관계가 경색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양자의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 과거 역사에서 강제적인 여원동정으로 왜구의 침략을 받아 고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고 명나라와 일본의 무역분쟁에 끼어 있다가 임진왜란을 초래했다. 결국 남북한은 양강 구도의 경계선에 서있으면서 북핵 문제와 민족통일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와중에 한국은 사드 배치를 추진하는 것은 양강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국민은 정부의 지혜로운 국제균형전략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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