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834년 신라의 흥덕왕은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국민들의 생활 전반에 대한 금령을 내리고 이를 어길 경우 형벌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때는 신라 하대에 해당하는데 천년 역사 가운데 후반기에 속한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신분의 상하와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생활의 품격을 철저히 규제하였다.
첫째 색복령(色服令)은 사람이 입는 의복에 대해 여러 가지 비단의 품질뿐만 아니라 색깔마저 신분에 따라 정해놓은 것이다. 둘째 거기령(車騎令)은 수레나 기마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통행하는 것에 대해 수레나 기마에 장식하는 것을 신분에 따라 제한하는 것이다. 셋째 기용령(器用令)은 기본적인 음식이나 기호식품에 사용하는 그릇들을 신분에 따라 정해놓았던 것이다. 넷째 옥사령(屋舍令)은 침소의 크기와 지붕 기와 계단 등을 꾸민 장식에 대해 신분별로 차별한 것이다.
먼저 색복령을 살펴보면 진골신분은 품격이 가장 높게 비쳐지는 자주색 비단을 입을 수 있으나, 계수금라(罽繡錦羅) 라는 물품은 아라비아산 고급 양탄자와 화려하게 수놓은 중국의 고급 비단을 뜻한다.
계수금라는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최고 신분인 진골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실제로 진골 귀족들은 많이 사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거기령을 보면 진골에 대한 제한은 없으나 육두품이 말 5마리까지 평민이 2마리 이상 마구간에 넣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말은 자가용 승용차와 같은 것인데 평민조차 부유하면 2대 이상의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신라 서울 경주에는 도로시설이 요즘보다 잘 되어 있었다. 도로는 하수시설을 경계로 보도와 차도로 구분되고 차도 가운데에는 기마가 달리는 부분의 좌우에 말이 끄는 수레가 다니는 몇 차선이 있었다고 한다.
기용령을 보면 진골은 금그릇 은그릇 및 금으로 도금한 그릇의 사용을 금하며 그 외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라비아산으로 장식한 물품의 사용조차 못하게 한 것이다. 금그릇 은그릇 및 금으로 도금한 그릇은 왕실에서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는 진골 귀족들이 사용하고 있었으며, 평민들조차 아라비아산 물품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옥사령을 보면 안방은 진골이 2.7평을 넘지 못하고 평민은 안방이 1.1평 이하로 제한하였다. 그런데 진골에서 평민 모두 당나라 기와를 덮지 못하며, 겹처마를 만들지 못하고 물고기장식을 조각하지 못하며, 금·은·놋쇠·오색비단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그 외에 삼중 계단이나 담장에 들보와 마룻도리를 시설하고 석회도 발랐는데 이를 금지한다고 하였다. 이는 부유하면 신분에 관계없이 외국산 물품으로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시내에 도로가 발달하였다는 사실은 서울의 인구 집중현상과 함께 울산항을 외항으로 하는 국제무역이 크게 발달하여 아라비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해상실크로드가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 서울에는 모두 기와집이었고 숯으로 난방과 요리를 하였다고 찬양할 정도였다. 수준 높은 생활은 진골이나 부유한 평민 즉 서울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진골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적어도 서울사람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품격이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높은 문화를 누릴수록 낡아빠진 사회모순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신라인은 폐쇄적인 골품체제의 모순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흥덕왕은 이러한 현상을 위기로 간주하여 수구적인 법으로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당시의 경제 발전을 국가에서 과감히 수용하여 쓸모없는 골품제를 파기하고 현실에 맞는 제도로 개혁하였다면 신라의 미래는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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