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이희용 연합통신 기자 | | ⓒ 경북연합일보 | |
1958년 9월, 1남 3녀를 거느린 서른두 살의 가장이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신분도 내던지고 유서도 미리 써둔 상태였다. 그의 이름은 김찬삼. 30여 년에 걸쳐 3회의 세계일주를 포함한 21회의 해외여행으로 160여 개국 1천여 개 도시를 누빈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지구를 32바퀴나 돌 수 있는 거리, 시간으로는 꼬박 14년이 걸렸다. 김찬삼은 1926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형이 자전거 여행 도중 사고로 숨졌는데,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에서 '언젠가는 안데스 고원을 넘고 싶다'는 글귀를 보고 형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는 결심을 한다.
1944년 인천고를 졸업한 뒤 세계일주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한다. 1950년부터 숙명여고와 인천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나라 밖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1차 세계여행은 미국 유학길을 겸한 것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대학원 지리학과에 재학하며 미국 본토를 누비고 알래스카를 다녀온 뒤 졸업 후 꿈에도 그리던 남미로 향한다. 그러고는 아프리카와 중동을 거쳐 61년 7월 귀국한다. 유학생활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김찬삼은 동남아·서남아·아프리카를 누빈 2차 여행(63.1∼64.8)을 마치고 1965년 수도여자사범대(세종대 전신) 교수로 부임한다.
그 뒤 3차(69.12∼70.12) 동남아·남태평양, 4차(73.11∼74.3) 아마존 유역, 6차(76.7∼9) 북극권, 7차(77.12∼78.3) 갈라파고스제도, 8차(82.7∼83.1) 중남미 카리브해 등으로 행로가 이어진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시간에는 틈틈이 여행기를 집필했다. 1962년 첫선을 보인 것은 '세계일주무전여행기'(어문각).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기였다. TV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고, 해외여행 자체를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김찬삼의 책은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대형 판형과 초호화 양장본에 전면 컬러로 꾸민 '김찬삼의 세계여행'(삼중당)이 1972년 처음 발간되자 독자들은 대자연의 신비와 윈시 부족의 생활상에 매료됐다. 때마침 불어닥친 부동산 개발 붐과 교육 열풍과도 맞아떨어져 새집으로 이사하거나 중고생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서가에 이 책을 꽂아놓는 것이 유행이 됐다. 모두 10권으로 완간된 이 전집의 판매부수는 100만 권을 넘어섰고 김찬삼은 일약 명사로 떠올랐다.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
75년 11월 6일 한 신문에 실린 광고 문구는 '4차여행 2차증보 전8권의 최신판/와이드 칼라판 김찬삼의 세계여행/한국이 낳은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교수의 4차에 걸친 모험과 드릴에 넘치는 경이의 세계답파기!!'였다. 환갑이 넘어서도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1차(86.12∼87.4) 북부아프리카, 14차(89.12∼90.2) 남극권, 15차(90.7∼8) 동유럽 등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외여행에 나섰다.
1992년에는 실크로드∼서남아∼유럽을 잇는 7만3천㎞의 여정에 올랐다가 열차 사고로 머리를 다쳐 언어장애를 입고 활동을 중단했다. 2001년에는 인천광역시 영종도에 세계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이 들어서 그가 평생 모은 여행 관련 서적 2천여 권을 기증했다. 2003년 별세한 뒤 2008년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고 김찬삼여행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부터 한양대박물관에서는 '여행하는 인간'이란 주제 아래 김찬삼이 쓰던 카메라·배낭·신발·스크랩북·원고 등을 비롯해 여행과 관련된 각종 전시물이 선보이고 있다. 김찬삼이 처음 해외로 떠나던 그해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이름은 한비야. 그는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보고 세계일주의 꿈을 키운 '김찬삼 키드'다. 김찬삼이 그랬듯이 미국 유학을 마친 뒤 33살 때 잘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오지 여행을 떠난다. 이제는 그가 처음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즈음에 태어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읽고 자란 '한비야 키드'들이 오지로 배낭여행을 떠나고 재난 현장에서 긴급구호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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