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문무학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인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채식주의자」는 한 작가가 같은 주제나 같은 인물로 작품을 잇달아 쓴 연작소설(聯作小說)이다. 작가의 말을 따르면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 다. 작가가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까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을 중편으로 따로 썼고, 2007년 이 세 편을 장편「채식주의자」로 묶어 「창비」에서 발간했다. 전편에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은 영혜다. '채식주의자' 에선 영혜의 남편이,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가, '나무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 인혜가 관찰자가 된다.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영혜가 폭력의 긴 그림자에 갇혀 겪는 고달픈 한 생애가 육식을 거절하는 행위를 통해 꼬여지기 시작한다. 육식의 거절이 빌미가 되어 남편과 헤어지고,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유로 비디오 아티스트 형부의 예술적 대상이 되었고 예술이 인륜의 경계를 넘어서게 한다. 이를 안 언니 인혜는 두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다스리며 그녀는 놀랄 만큼 이성적이다. 남편은 버려도 동생은 차마 버리지 못하는 인혜는 영혜가 입원한 정신병원을 오가며 간호한다. 이런 슬픔 혹은 고통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본다.
그런데 그 많은 슬픔의 원적지는 이외로 사소한 데 있었다. 지독하게 아픈 삶의 근원적 원인은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그 폭력이 만들어낸 긴 그림자는 좀체 걷히지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폭력의 힘은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영혜의 남편은 현실주의자였고, 그녀의 형부는 예술에 삶을 함몰시키는 예술가였다. 인혜 만이 그 모든 아픔에 맞서며, 영혜의 습한 삶의 물기를 닦으며 함께 젖고 있다. 폭력의 트라우마에 휩싸인 영혜는 '채식주의자'에서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로는 아무 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라고 말한다.
'몽고반점' 에선 보디 페인팅을 한 영혜가 형부에게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요. 나중에 지워지더라도 다시 그려주면 좋겠어요" 라고 한다. 형부의 예술 활동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다. '나무불꽃'에서 영혜는 몸을 거꾸로 세우며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 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들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라며 놀라워한다. 바르게 서서는 돌아볼 수도 없는 그의 삶이라서 그럴 것이다. 아무것도 죽일 수 없는 젖가슴을 사랑한 영혜, 그러나 그는 사람을 죽이진 않았어도 그가 가진 병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의 삶을 망가뜨렸다.
삶의 아름다움이나 희열이 보이지 않는 소설이다. 소설 전체에서 삶의 아름다움이나, 삶의 반짝임이 드러나는 문단은 없다. 그것은 결국 작가가 읽은 이 세상의 풍경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삶, 아니 여러 사람의 삶을 이렇게 철저하게 부셔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포가 더하고 잔인함이 더 해지는 것은, 작가가 소설에서 드러낸 잔인함 그 만큼, 폭력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리라.
이 세상에서 폭력을 행사해도 좋을 사람은 없다. 훈육의 핑계도 수용될 수 없다. 작가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말 누가 들어야 하는가?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 모두 다 들어야 한다. 폭력이 만드는 그 길고, 크나큰 파괴력을 모두가 보아야 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아름다움을 위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은 폭력 없는 세상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폭력에 당하는 사람도 있어선 안 된다. 아무도 폭력을 행사할 수 없고 아무도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아야 한다. 「채식주의자」는 그런 세상의 문을 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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