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흔히들 신라 박제상은 한국역사상 충성스러운 신하의 전형으로 1천 6백년동안 칭송되어오고 있다. 박제상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의 후손으로서 파사왕의 직계 5세손이었다. 박제상이 살던 때는 신라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안으로는 새로운 김씨왕조가 탄생하면서 내물왕과 실성왕의 왕위경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경쟁하기 위해 신라에 접근해오면서 신라는 점차 국제관계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가 신라의 내정을 간섭하게 되면서 핵심 귀족이었던 박제상도 급박한 정황에 대처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장인인 실성왕이 축출되고 라이벌인 동서 눌지왕이 즉위하자 박제상은 중앙정계에서 쫓겨나 양산으로 좌천되었다. 그것만으로 박제상이 역사에서 사라졌다면 후세에 충신의 전범(典範)으로 길이 남을 수는 없다. 인생에서는 몇 번의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 기회는 스스로가 만들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박제상을 박제상답게 만든 것은 동서 눌지왕의 용단(勇斷)이었다.
눌지왕은 한때 정적으로서 좌천당한 박제상을 서울로 소환하였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신라 정계에서 차지하는 박제상의 위상이 있었던 것이다. 눌지왕이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에 볼모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동생들을 귀국토록 하여 왕실의 안정시키는 과제였다. 눌지왕은 서울의 귀족뿐 아니라 지방의 유력자들까지 소환령을 내려 이 미션을 수행할 인물을 물색하게 되었다. 뜻밖에도 미션의 적임자로서 박제상이 추천되었던 것이다. 눌지왕은 적잖이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으나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위해 사감(私憾)을 버리고 박제상을 상경시켰다.
그런 박제상은 고구려에 인질로 간 눌지왕의 큰 동생 복호를 데리러 가서 고구려의 장수왕을 논리정연하게 설득하여 복호의 귀국을 성공시켰다. 그 비결은 상대국의 입장을 한껏 치켜세워주면서 실리를 찾는 진심어린 열변이었다. 오늘날에도 되새겨 볼만하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박제상에게 눌지왕은 왜국에 억류되어 있던 막내 미사흔마저 간곡히 부탁한다. 이때 박제상은 운명을 걸고 계획을 치밀하게 짰다. 신라를 배신하고 도망쳤다는 각본으로 일본 왕을 속이고 기회를 엿보았다.
여기에는 박제상의 지혜가 돋보이는 복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큐슈의 왜국에서 멀리 서울 경주까지 탈출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므로 신라에 내란이 일어난 것으로 꾸며 탈출하기에 가까운 거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왜국은 신라를 정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쓰시마까지 진군하였다. 이때를 틈타 박제상은 미사흔을 무사히 신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잔인하게 화형당하였다. 박제상의 순국은 단순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박제상은 왕위쟁탈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고자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라이벌 눌지왕조차 처형하지 못했다. 왕제(王弟)의 송환이라는 미션이 성공하더라도 자신을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임에도 과업을 달성하고 자신을 희생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의가 내포되어 있었다.
첫째는 박씨 가문의 위상을 회복시켜 핵심 귀족세력이 되었다. 박제상의 공덕으로 후손이 신라 왕실의 왕비족이 되어 김씨왕실을 제외하고 최고의 귀족 가문이 되었다. 둘째는 자신을 희생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해낸 만고의 충신이 되었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인간은 개인적인 영달이나 자신의 가족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를 위하는 일에는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국면에 처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박제상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 현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현재의 역사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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