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신라의 모체는 진한의 사로국이었다. 기원전후부터 진한을 비롯한 삼한은 낙랑군과 교류하고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중국에는 후한왕조가 쇠퇴하고 위(魏) 오(吳) 촉(蜀) 3국으로 분열하여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원래 중국은 아한대 온대 아열대 등의 기후대가 있어 다양한 물자를 산출하였다. 하나의 통일왕조로 존속할 경우에는 대륙 내부에서 동서교류와 남북교류로서 자급자족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3국으로 분열된 경우에 각 나라에는 물자가 부족하여 외부 대륙과 물자를 교류해야 경제가 유지되었다.
3국 가운데 조조의 후손이 세운 위나라는 동방의 만주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로부터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 물자는 군수물자로서 철을 비롯하여 실용적이고 값싼 비단 중국에서는 귀한 고급 목재 등이었다. 특히 낙랑군은 삼한이나 왜에서 수입한 비단을 재가공하여 본국에 팔았는데 이를 낙랑견이라 하여 인기 상품이었다. 위나라는 낙랑군과 그 남방의 대방군을 접수하여 동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3국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3세기 당시에 삼한은 한강유역 금강유역 영산강유역 경남남해안 낙동강유역 그리고 동해안 등의 6개 권역으로 나뉘어 낙랑군 대방군 2군과 교류하였다. 그런데 담당 관리가 진한의 8국만 낙랑군과 교류하게 하고 나머지 5권역은 대방군과 교류하게 하였다. 이에 5권역이 크게 반발하여 2군과 충돌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삼한은 낙랑군과 교류하는 것이 보다 유리하였는데 진한 8국만 낙랑군과 교류하게 하고 다른 5권역은 신설한 대방군과 교류하게 조치함으로써 반발한 것이다. 진한의 8국은 동해안에 위치하였으므로 대방군보다 낙랑군과 교류하기가 편리하였다. 왜냐하면 진한 8국이 남해안을 돌아 서해안으로 올라가 대방군과 교류하는 것은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사로국을 비롯한 진한의 8국은 경제를 크게 발전시켜 나아갔으며 이를 기반으로 사로국이 중심이 되어 신라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최근 포항시·경주시·영덕군·울진군·울릉군 등 동해안권의 5개 시군의 국회의원 당선인 4명과 시장·군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역발전을 위한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행정협의회라는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본 협의회는 경북 동해안권의 상생발전을 위한 동해안고속도로 건설사업 등 공동발전 사업 10건과 지역 현안사업 15건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동해안권 공동발전사업으로 (서해안과 달리 너무나 지지부진했던) 동해고속도로 건설, 동해중남부선 철도건설사업과 함께 경주의 관광 및 물류인프라 개선을 위한 국도31호선 확장, 경북북부권의 지역경제 활성화를 견인할 경북순환철도망 구축에도 힘을 모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척추 광역교통망이자 장차 동북아 핵심 교통망을 구축하게 될 전망이다. 지역민으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소식일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육상교통망 외에 연안이나 해상교통망에도 더욱 더 적극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육로를 통한 물류보다는 해상을 통한 물류가 운임이나 규모 면에서 훨씬 효과가 크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환동해 핵심 거점항인 영일만항 건설 등과 같은 해상물류 거점의 구축은 각 권역과의 유대를 통하면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해양교류는 주로 서해와 남해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왔다. 반면에 동해를 통한 교류는 험한 파도가 친다고 오인하여 거의 무시해 왔다. 특히 신라에 대해서는 한반도 동남쪽 구석에 치우쳐 발전이 매우 느린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신라의 발전을 연구해온 필자로서도 동해안권의 협력적인 개발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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