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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 숨결 담은 놋그릇… 그 찬란한 生氣를 품다
<인향천리-11> 방짜유기 장인 김완수 씨
"방자유기는
전통의 멋과
건강함을 지닌
생명의 그릇"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6년 04월 14일(목)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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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김완구 씨가 막내 아들 김덕우 씨에게 유기제작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 | ⓒ 경북연합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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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주유기농방에서 제조한 유기제품 안내 책자. | | ⓒ 경북연합일보 | | '생명의 그릇' 독에 반응해 검게 변하며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대를 물려 사용한 그릇, 탁월한 보온, 보냉 효과, 은은한 품위와 고급스러워 웰빙시대에 재조명되고 있는 경주방짜유기의 장인 김완수 선생을 만났다.
김완수 씨는 1953년 사정동 1-26번지. 경주도서관 관사(현 서라벌문화회관)에서 태어났다. 선친이신 김종준 선생이 경주시립도서관장으로 제직하던 시절이다. 그 후 선친의 지인이 마을 문고 본부를 설립하고 서울로 상경하면서 김 선생도 동행하게 된다. 이때 그는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선친이 마을문고 본부에서 퇴직하고 지인을 통해 시작한 사업이 금속공예사업이다. 그의 선친은 1969년 마포금속공예사를 창업하게 된다. 이 시절 대부분의 금속공예사들은 수출업체의 하청을 받아 사업을 운영하던 시절로 원청이 부도가 나면 하청도 연쇄부도를 맞는 것이 허다한 시절이다. 그의 선친도 몇 개의 거래처가 부도가 나면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결심하게 된다. 중학교를 마치고 가업에 뛰어들어 시작한 유기공방의 일이 지금까지 천직으로 알고 이어오고 있다. 그때의 뼈아픈 고생이 유기공방의 모든 공정을 온몸으로 깨우치고 다듬어 지금의 기술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장인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도,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오직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아버지를 돕기로 했다. 아버지를 도와 가족들을 편히 먹이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고 유기장의 길로 들어서던 시절을 회상한다. 어린 영혼의 절실함과 유약한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일했지만 끝내 가업은 폐업하게 된다. 그는 "가업이 폐업되면서 힘들었지만 슬퍼할 여유와 시간이 없었다. 지금의 아버지들은 먹고살기에 너무 바빴다"고 절망의 시간을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뒤 돌아볼 겨를 없이 김 선생은 (주)경남기업 마포유기공장의 개발실에서 석고조각 기술을 배운다. 이곳에서 자신의 또 다른 소질을 자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디자인 기술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디자인 감각을 믿고 20세의 나이에 금속공예 디자인개발 자영업을 시작해 창의적인 자신만의 기술을 보유하게 된다. 1977년 재대 후 가업을 일으키기 위해 부천에서 동협공예점을 재 창업하고 부친의 지도하에 가업에 종사하면서 본격적인 유기공방의 운영에 참여한다. 그리고 1984년 경주민속공예촌이 설립되면서 경주를 고향으로 둔 공예인들을 모집하는 것을 알고 경주에 낙향해 지금의 공방에자리 잡으면서 경주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방짜유기에 대해 "방짜유기는 청동기 시절을 거쳐 고려시대에 왕족들의 생필품과 주방용품으로 사용되면서 오랫동안 중산층 이상의 상류사회에서 사용되어온 우리민족 고유의 그릇과 생활용품이다. 일제강점기 유기공출로 모든 가정의 유기들이 수탈당하고 6.25이후 일반가정에서 연탄을 사용하면서 일산화탄소에 변색되어 사라져 갔다"며 "최근 각종 실험을 통해 병원균, O-157 살균기능, 농약성분 검출기능 등이 밝혀지면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열 보존률은 사기그릇, 스테인리스, 방짜유기 중 방짜유기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악기, 식기 등 각종 생활용품 등으로 제작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경주에서의 생활은 선친의 경주민속공예촌 초대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실질적인 공장일은 그가 대부분 이끌어 갔다. 그의 동료이자 신뢰의 대상인 선친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자신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가풍으로 집은 늘 어려웠다고. 평생을 근검하신 모습으로 가르치고 '분수에 맞게 살아라' 는 말을 가슴에 새겨주신 분도 선친이시다. 늘 그늘로 태산으로 옆을 지켜주시던 분이 2004년 중국공장에서 제품생산에 전념하고 있을 때 황해를 건너 날아든 부고에 모든 것을 던지고 찾은 고향 경주. 그리고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오랜 시간 앓아야 했던 불효자식의 가슴은 지금도 울고 있다고…. 살아있는 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선친과 마지막까지 지켜가든 유기공방을 지키고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막내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막내아들 김덕우(28)씨는 "어릴 때부터 용돈이 필요하면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재미도 느끼고 손에 익는 맛이 있었다. 학창시절 서울 독립기념관에서 아버지의 작품인 '금동대탑'을 보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의 손기술이 내게도 전해져 온다는 것을 믿고 기술전수를 마음먹었다"며 "앞으로 공장일을 전체적으로 다 배워 아버지의 일을 들어드리고 싶다. 또 아버지의 시간을 만들어 명장의 위치에 계시도록 돕고 싶다. 전국에 공방을 알리고 사업을 다양화하고 고도화 시켜갈 계획이다"고 젊음폐기를 들어낸다. 새벽부터 일을 배우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안쓰럽기도 대견하기도 하지만 내 아버지의 일을 이대로 내 대에서 멈출 수 없기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막내에게 전수하고 있다. 그는 몸소 체득한 유기제조공정과 디자인기술을 접목해 전통의 장점과 현대의 편의성을 결합하기 위해 경주유기공방의 브랜드를 개발하고 상품등록을 통해 지적재산권을 형성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다. "경주유기공방의 목표는 최고의품질, 거품없는가격, 품위있는디자인, 고객감동A/S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경상북도 공동브랜드인 '신라리안' 인증업체로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개별적인 브랜드를 개발하고 디자인을 특화시켜 나갈 계획이다"고 계획을 설명한다. 그는 현대 실용성과 전통의 멋과 건강한 그릇인 방자유기는 사람과 같아 스스로 환경에 반응하며 살균력이 있어 삶아 소독하지 않아도 되며 3주의 관리 후에는 스스로 환경에 적응해 얼룩과 녹이 설지 않는다고 한다. 생명의 그릇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와 같은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실용성과 아름다운 멋을 디자인해 널리 보급하고 싶다는 그는 새로운 기술과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학업과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는 그의 얼굴엔 놋쇠만큼의 굳은 의지가 유기처럼 빛을 내고 있다. 글 권민수 기자/사진 최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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