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 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실성왕은 내물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후 내물왕의 아들들에 대해 보복을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라이벌이었던 내물왕이 실성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까닭이다. 402년 실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왜국과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어린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냈다. 당시 신라는 왜의 침입이 잦아 큰 우환이 되었다. 심지어 399년 말에 왜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왕성이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다가 고구려의 구원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실성왕은 왜와 우호를 맺고자 볼모를 보내어 관계를 개선하려 한 것이다.
실성왕이 즉위한 지 11년째인 412년에 고구려도 볼모를 요청하였다. 실성왕은 고구려에 볼모로 간 경험이 있어 외교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물왕의 둘째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두 아들을 외국에 볼모를 보냄으로써 내물왕 후손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물왕의 장남 눌지가 있는 한 안심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417년에는 눌지마저 제거하고자 하였다. 표면상으로 실성왕은 눌지에게 동생 복호와 볼모를 교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맏형으로서 눌지는 불쌍한 동생 대신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고자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왕은 고구려에 볼모로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연락하여 "눌지를 보거든 죽여라"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눌지가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보고는 사실을 알려주니 눌지가 이를 원망하여 오히려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돌아갔다고 전한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이상국가로서 신라본기를 편찬하였으므로 왜가 신라를 위기에 빠뜨리자 고구려가 개입한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눌지가 분노하여 실성왕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 왕족 한 사람이 경비가 삼엄한 궁궐에 들어가 국왕을 시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삼국유사」는 신라의 국정을 간섭하고 있는 고구려의 군대가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옹립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확실성이 높다. 1970년대에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에 의하면 신라토내당주 즉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밝혀져 학계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는 고구려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있어 신라 국민은 위기를 느끼고 국민의 일치단결이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실성왕은 개인적인 보복에 치중하여 국내 여론이 좋지 않았다. 고구려도 신라를 자기편으로 두기 위해서는 신라 내부의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여망을 받고 있던 눌지를 왕위에 옹립하고자 실성왕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박제상이었다. 두 사람은 실성왕의 사위로서 동서지간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였다. 만약에 실성왕이 눌지를 제거하였다면 박제상이 후계자로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을 정도로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내정간섭 아래 어쩌면 박제상은 박씨왕조의 부활을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눌지왕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는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므로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대립보다는 일치단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눌지왕은 박제상을 제거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며 또한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눌지왕은 박제상을 처벌하여 국왕의 위상을 세우되 분열로 치닫지 않는 선에서 처리하였다. 눌지왕은 즉위한 이후 즉시 박제상을 삽량주 간으로 임명하여 양산 지방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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