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세상의 인간에게는 각자 라이벌이 있다. 역사상 신라에도 수많은 라이벌이 있어 갈등과 경쟁을 통해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중 박제상이 활동하던 시기에 왕위를 둘러싼 라이벌끼리의 경쟁이 치열하였다. 신라왕에 즉위할 무렵 내물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실성이었다. 내물과 실성의 공통점은 같은 김씨이면서 미추왕의 부마였다는 점이다. 신라의 왕위계승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었다. 물론 정실 왕비의 소생인 적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가장 기본 원리이다. 적자가 없는 경우 후궁 등의 소생인 서자는 왕이 될 수 없고 조카나 형제 드문 경우이지만 숙부가 왕위를 이었다. 이를 방계계승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국왕의 방계도 없는 경우에는 딸에게 그 권리가 주어지는데 여성이 아니라 남성 즉 사위가 왕위를 이었다. 이를 여서(사위)계승이라 한다. 신라는 이와 같은 원리를 철저히 지켜 천년의 역사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미추왕은 적자인 아들이 없고 두 딸만 있었으므로 두 명의 사위를 두었다. 한 사람은 큰 딸 보반부인과 혼인한 내물이었고 또 한 사람은 작은 딸 아류부인과 혼인한 실성이었다. 즉 미추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는 두 딸의 남편 즉 부마인 내물과 실성이었다. 내물은 아버지 말구가 미추왕의 아우였으므로 미추왕이 큰 아버지이자 장인이었다. 신라 왕실에서 보면 같은 동성끼리 혼인하는 근친혼이 있었다. 당나라 역사책[구당서, 신당서]에도 신라의 근친혼이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김씨로서 최초의 왕이 되었던 미추왕이 조카 내물을 후계자로 두고자 했던 것은 김씨왕실의 안정된 왕위세습체제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미추왕도 석씨 조분왕의 딸 광명부인과 혼인하였다. 미추왕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서지 이찬도 석씨와 혼인하였다. 또한 두 세력은 박씨와도 혼인을 맺고 있었는데 특히 실성은 박제상을 사위로 맞아들여 세력을 더욱 더 키워가고 있었다.
미추왕이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사위로 두었던 것은 김씨세력의 결집을 위해서였다. 미추왕 때부터 경쟁관계에 있었던 대서지 일파가 우려가 되었지만 그를 가볍게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두 세력의 경쟁 속에서 내물왕이 즉위하였으나 당시의 국제정세도 급변하는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세력인 낙랑군을 병합한 이후 국경이 맞닿은 백제와 충돌하게 되었다. 열세를 느낀 백제는 신라를 비롯하여 가야를 통해 왜국과도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도 신라에 접근하여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신라가 북중국의 강자 전진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물왕은 당시에 어린 아들들을 두고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라이벌 실성 때문이었다. 때마침 392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볼모를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양국이 동맹을 맺을 즈음에 백제가 신라에 접근하여 동맹을 요청한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신라왕의 동맹을 확실히 하기 위해 볼모를 요구하였으며 내물왕은 라이벌 실성을 외국으로 내보냄으로써 후환을 미리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400년 신라구원전쟁 이후 고구려는 조공하지 않는 내물왕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401년 고구려는 볼모 실성을 귀국시켜 신라 정계의 여론을 바꾸어 놓았고 내물왕이 사망하자 아들 눌지가 아닌 라이벌 실성왕이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눌지왕 때에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가있던 복호를 쉽게 송환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박제상이 고구려와의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이며 장인 실성왕의 즉위에도 일정한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머잖아 박제상은 전혀 예기치 않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또 다시 동서지간의 알력으로 파란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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