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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향천리-경주 건천리 이발사 오인백 옹>'사각사각'반백년…'우수수'내려앉은 추억
평생 손바리깡 하나로 삶을 다듬어 온 그는
삶이 다 할 때까지 하얀 가운을 입고
그 곳에서친구들을 기다릴 것이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6년 03월 31일(목)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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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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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건천리에서 46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원이용원'. | | ⓒ 경북연합일보 | |
|  | | | ↑↑ 세알곡 이발사 오인백 옹 | | ⓒ 경북연합일보 | | 6.25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아니한 두 아들, 그 연금과 가산을 틀어 다리를 놓고 두 아들의 넋이라도 건너오길 기다린 김 할머니의 한이 흐르는 작원천, 이곳에 또 하나의 전설이 물어 익어간다. 마을길을 따라 들어서면 길가 집 뒤에 자리한 이발소 입구에는 '경로우대시범이용소'라는 나무간판이 세월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 지난 46년을 새하얀 이발사 가운을 입고 손님을 맞고 있는 오인백(80)씨가 하얀 웃음으로 객을 맞이했다. "멀리 오느라 고생 많니더, 커피 한잔하고 얘기 합시데이" 투박하면서 억샌 경상도 사투리 속에 '뚝뚝' 떨어지는 마음씨도 내미는 손의 굳은 살 만큼이나 거친 흙 내음이 난다. 순백의 가운은 백발이 된 촌로의 탈색된 웃음처럼 희지만 희지 않는 세월의 낡음이 구석구석 남아 있다. 낡은 소파하나와 이발용 의자하나, 진열장엔 손바리깡, 면도칼, 면도솔, 가위, 머리빗 등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주인과 닮아 세월이 느껴진다. 이발용 의자 앞 벽면 전체를 거울이 설치돼 또 하나의 공간이 50년의 깊이를 들어내고 있다.세면대는 손수 만든 시멘트에 타일을 발라 재래식으로 머리를 감게 되어 있어 지금은 볼 수 없는 옛 목욕탕을 연상시킨다. 이곳이 간판도 없이 구전되어 오는 '성원이용원'이다. 오인백(80), 그는 이곳의 주인이자 농부이기도 한 마을에 몇 안되는 구성원이다. 그는 고향인 건천에서 나고 자라고 젊어 타지를 다녀왔지만 그래도 경주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건천토박이다. 그는 지금의 초등학교인 건천공민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이발소를 운영하게 된 것은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부터 돈이 없어 동내 이발소의 '바리깡'으로 친구들과 머리를 깎고, 깎아주던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발기술을 배우게 된다. 자유당시절인 이때는 가난 속에 국민들은 먹고 살기 급급해 학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젊은 청춘들은 거친 뒷골목의 어둠속에 희망을 묻어 버리고 피 끓는 청춘을 온몸으로 터트리며 배우지 못한 설움을 무력으로 눌러버린 시절이다. 오인백 옹은 "지금 생각하몬 부끄럽고 미안 하니 더, 찢어지게 없고 못 배우던 자유당시절 이니 더, 그래도 무시당하기 싫어, 힘으로 날뛰던 철없든 시절 이지요"며 "그래도 젊은 시절에는 경북에서는 낼 함부로 못했지요, 오인백이 하면 다 알아 주고 힘 좀 썼니더"라며 젊은 날을 회상한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것에 남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깡으로, 악으로, 무리를 이루어, 경주가 좁다던 시절, 그 결과 대구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반성과 재활훈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 준비한 것이 손에 익은 이발기술이다. 겨우 한글만 깨친 그 여서 남들보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공부해 이용원 면허를 취득한다. 그의 나이 20대 말. 마음잡고 자리 잡은 곳이 지금의 '세알곡'이라 불리 우는 작은 마을이다. 어머니의 터전이기도 한 이곳에서 그는 산을 개간하고 들을 갈아 농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세알곡을 걸어 넘던 용명리와 대곡리 사람들을 위해 집 뒤에 작은 이발소를 만든다. 이때가 1971년 1월 1일 이다. 오인백 옹은 "그때는 차가 귀한 시절이라 걸어 재를 넘었니 더. 사람들이 많았니 더, 주로 학생들이 많이 다녔고 빡빡머리를 하던 시절이라 바리깡과 가위만 있으면 됐지요. 그때는 '아' 들이 소복하게 왔니더"라며 촌 동네 이발소의 전성기를 들려준다. 이 시절 이발비는 2-30원이었다. 막걸리 한 병이 15원하던 시절이니 그래도 그때는 꽤 괜찮은 수입원 이었다고, 이발 실력이 좋아 인근 동내 마을 학생들과 남자들이 소문이 나면서 산내에서도 찾아왔다고 한다. 이발소도 잘되고 농사도 자리 잡아 갔다. 그는 이때에 장가들기를 결심한다. 건천의 용한 중매쟁이인 최 씨가 나서 건천의 부자집 처녀에게 중매를 넣는데 "처음에는 건천 깡페라 카며 처다 보지도 않데요, 그래서 한번은 찾아가 딸래미 달라 카이. '어림없다' 해서 나오는데 처자가 날보고 웃는 기라. '됐다' 싶어 억지로 데려왔지"라며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그러나 그는 멀리 밭에서 일하는 그녀의 구부린 허리를 보고 고개를 떨 군다. "고생만 시키고 호강 한번 못시켜 줬는데", 독백 속에 깊은 회한이 서려 있다. 그녀는 1남 5녀의 자녀를 낳아 여자아이 하나를 잃고 지금은 모두 출가해 가정을 이루었는데 "아들이 아직 장가를 안갔다. 서울에서 삼성에 다닌다. 좋은 곳 있으면 중매 서라"고 하나 뿐인 독자 아들을 걱정한다. "그게 쉽나, 지가 알아 해야지" 금방 안쓰러운 표정은 어디가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가 한마디 던진다. 그는 지금도 찾아오는 46년 된 손님친구들이 경주구석구석 30여명이 된다고. 손님들이 오래 묵으니 '친구'가 되었다. 이제는 나들이 삼아, 친구 보러 이발소를 찾는다. 이발비가 4천원짜리 담배 한 값이다. 오인백 옹은 "돈 때문이 아이 데이. 46년째 오는 이들이 있어 그냥 둔 데이. 친구들이 있는 한 그냥 둘 기다"고 말한다. 대부분 찾는 사람들이 보리 고개를 겪은 시골의 할아버지들이다 보니 들어 논에서 밭에서 거둔 작물들을 가지고 온다. 그럼 오 옹은 그냥 머리를 깎아주고 답례한다고. 평생을 손바리깡 하나로 삶을 가꾸고 다듬어온 그는 이제는 묵은 손님친구들이 그리워하는 장소로 변한 이발소를 46년 전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곳에는 젊은 청춘을 불사르며 거친 노도와 같은 삶을 산 깍두기 형님의 추억, 돈이 아까워 수 십리를 걸어 머리를 맡기던 깍쟁이 아버지, 정이 좋아 나들이 삶아 찾아오는 친구들의 추억이 낡은 이발의자에 뽀얗게 앉아 있다. 그들의 삶이 다 할 때까지 그곳에는 하얀 가운에 손바리깡을 잡고 있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취재에 협조해주신 경주시 공중위생계 김철화 계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권민수 기자 kms@kby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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