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잘 아시다시피 박제상은 외국에 볼모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내물왕의 아들이자 눌지왕의 아우인 복호와 미사흔을 구출해내고 왜국에서 순국한 만고의 충신이었다. 그런데 박제상 출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있었다.
먼저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에 의하면 파사왕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아도 갈문왕이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라 하여 박씨 왕족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 눌지왕 때 박제상이 왕의 두 아우를 구출하기 위해 소환되었을 때 관등이 내마이고 삽량주 간(「삼국사기」)이라 하거나 삽라군 태수(「삼국사기」)라고 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박제상의 출신에 대해 삽량 즉 양산의 지방관이라는 기록을 중시하여 지방세력으로 보는 주장과 파사왕의 후손이라는 기록을 중시하여 왕경인으로 보는 주장이 있어 왔다.
첫째로는 박제상을 지방세력가로 보는 주장이다. 그 근거는 파사왕(112년 사망)과 5세손 박제상(418년 순국) 사이의 현격한 연대차이(즉 418년?112년=306년÷5세대=61년의 부자간의 평균 연령차이)에 의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기록에 의문이 많으므로 박제상의 출신 기록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박제상은 원래 지방세력가였으나 왕경으로 사민되어 내마라는 관등을 수여받은 것으로 보았다.
둘째로는 박제상의 근거지는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신라에 복속되어 있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사민되어 서울에 정착한 존재로 파악하였다. 이 또한 박제상의 족보 기록을 부정하고 내마라는 하급 관등을 가지고 양산지역의 지방관이었다라고 전하는 기록만을 중시하여 박제상을 재지세력가로 본 것이었다. 셋째로는 박제상 열전에 전하는 족보를 그대로 믿어 박씨 왕족 출신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대부분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논문을 통해 밝히지는 않았다. 필자도 이 주장이 맞다고 보면서 좀 더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제상의 출자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이 있었음에도 위의 주장들에서는 미처 참고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사기」 왕력편의 실성마립간조에 전하는 “실성왕이 바로 치술의 아버지(王卽鵄述之父)다”라는 기록이다. 「삼국사기」 기이편의 내물왕 김제상조에 따르면 박제상이 왜국에 볼모로 억류된 미사흔을 구하러 갔다. 이때 박제상의 아내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위의 기록을 고찰하면 치술이라는 이름은 치술령이라는 고개 이름의 유래가 된 것이다. 어떤 이는 치술령이라는 고개가 원래 있었으므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고 반론한다. 그러나 지명 가운데 역사적인 사건이나 설화 전설에 연유하여 생겨난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실성왕의 딸인 치술부인은 남편 박제상이 돌아오지 못할 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을 바라볼 수 있는 고개에 올라가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고개를 치술부인의 이름을 따서 치술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박제상은 파사왕의 후손으로 전 왕족 출신으로서 진골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실성왕은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 외에 박제상도 부마로 맞아들였던 것이며 순국한 후에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였다는 점과도 부합된다. 이후에 그의 딸이 미사흔과 결혼하였고 부부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자비왕과 결혼하여 소지왕을 낳았다. 이로써 박씨 귀족은 김씨왕실의 왕비족이 되었다. 앞으로 박제상을 둘러싼 신라사의 흐름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를 자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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