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선석열 문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계의 원로를 우대하는 제도는 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 있어왔다. 궤장은 앉을 때 벽에 세우고 몸을 뒤로 기대는 데 쓰는 등받이와 보행에 편리하게 쓰는 지팡이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제도는 신라에 있었는데, 국왕은 70세 이상이 된 원로 가운데 특별한 경우 궤장을 주어 국정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궤장을 받은 인물은 문무왕 때의 김유신과 진순 성덕왕 때의 배부 헌덕왕 때의 충영 진원 헌정 원순 평원 등 8명에 이른다.
643년 당나라 태종의 여왕불가론을 제기함에 연동되어 647년 상대등 비담 등이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후 일부 귀족들은 당나라와 결탁하여 왕권에 대항하였다. 나당전쟁이 일어난 문무왕 때에 당나라는 친당 귀족들을 포섭하여 신라마저 손에 넣으려고 획책하였다. 문무왕은 외삼촌 김유신에게 궤장과 안석을 하사하고 국정에 참여케 하여 친당적 세력을 제압하고 정국을 안정시켰다. 673년에 김유신이 사망한 다음에는 재상 진순이 궤장을 받았다.
이것은 문무왕이 우려했던 친당 귀족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681년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에 일어난 장인 김흠돌 등의 모반을 진압했다. 문무왕의 혜안으로 궤장의 하사라는 원로우대정책을 통해 반왕권파의 반란을 진압하여 무열왕계 왕권은 백여 년간 유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덕왕대(702~737)에 이르러 상대등이던 배부는 궤장을 하사받았다. 당시 성덕왕은 후계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성덕왕 역시 신문왕의 차남으로 형인 효소왕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 늦게 얻은 아들들이 요절하고 막내 헌영(경덕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성덕왕 이후 어린 왕으로 인해 외척이 발호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배부 등과 같은 정계원로들을 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덕왕은 원로의 자문을 통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 강화에만 집중하였다. 또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외척을 중시하였다. 겨우 얻은 아들 건운(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외척이 발호하였다. 만약 5촌 조카인 김양상(선덕왕)에게 물려주었더라면 중대 무열왕계 왕권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 성립된 하대 원성왕계에서 정계 원로들을 우대하여 궤장을 하사하여 국정에 참여케 했던 왕은 헌덕왕이었다. 하대의 시작인 원성왕 때부터 후계자의 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원성왕은 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부왕보다 먼저 사망하여 직계 적자계승이 어려워졌다.
이에 원성왕은 장손 준옹(소성왕)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되었으나 2년만에 사망하였다. 소성왕의 어린 아들 청명(애장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숙부 김언승(헌덕왕)이 섭정이 되어 보필하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헌덕왕은 할아버지 원성왕의 유지를 이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계 원로들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아우 수종(흥덕왕)을 국왕에 버금가는 부군으로 삼고 원로들에게 궤장을 주어 정사에 참여하게 하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21세기에 이르러 현대 한국의 정치는 어떠한가. 여당이나 야당이라 할 것 없이 원로를 홀대하고 당 내부에서도 계파간의 계리계략이 난무하는 집단이기주의적 주도권 싸움의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다. 평소에는 민생의 심각성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다가 선거철만 되면 대학입시처럼 당선에만 집착하여 오히려 원로를 내쫓는 행태는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선진국의 정치인은 미래 비전을 가질 수 있는 역사인식에 정통하여 그 교훈을 활용한다고 한다. 백세 시대를 맞이한 현재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깊이 새겨 신구의 조화를 이루는 역사적 희망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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