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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星보다 빛나는 인물, 최진립 장군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6년 03월 06일(일)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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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강병찬<문화부차장> | | ⓒ 경북연합일보 | | 유사 이래 최대 국난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둘 다 겪으면서도 오직 충성과 절의로 전장에서 장렬히 순국한 분이 있다.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인 최진립(崔震立) 장군은 경주가 본관으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의 후예이다. '경주 최부자'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최국선(崔國璿)의 조부이다. 선조 원년인 1568년에 경주시 내남면 구미리에서 태어난 장군은 25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을, 30세인 1597년 정유재란을, 인조 14년인 1636년 69세 때 병자호란을 맞아 청군과의 용인 험천(險川)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순국에 이어 인조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의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다. 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해 수많은 백성을 인질로 청나라에 보내야 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도 조선 조정은 반성은커녕 망국의 행보를 계속했다고 사가들은 전한다. 임진란 때 펼쳤던 일부 개혁 조치조차 회귀를 했고, 붕당과 세도가의 폐해는 안보관련 국사에 이르기까지 모함과 이전투구가 횡행했다. 임금은 권력아귀의 노예가 돼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대비를 폐했다. 또 정변을 일으켜 수많은 신하를 죽이는 등 조선 왕조의 내력이라 할 혈육과 자국민 살육을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행보는 분명했다. 우직하리만큼 '오직 충성', '오직 희생'이 장군의 품격이었다. 그의 충성은 무능하고 포악한 군왕에게도 해당됐으며, 그의 희생은 자신은 죽더라도 집안의 노비를 살리려 하는 등 성자의 반열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장군은 또 청백리에 녹훈될 만큼 청빈한 삶을 살았다.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소개된 경주 최부자 최국선 열전에는 최국선이 조부에게서 가장 깊은 감흥을 받은 것으로 묘사돼 있다. 장군의 유품이 남아있는 경주의 용산서원은 지방문화재로, 충의당은 지방민속자료로 각각 지정돼 있다. 종가에는 장군이 심은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1905년에 갑작스럽게 고사했다가 1945년 경에 소생했다 한다. 이는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과 이후 광복과 연관되어 널리 회자됐다. 장군의 저서인 '잠와선생실기'가 목판으로 간행됐고 1975년에 국역됐다. 실기 서문은 청대 권상일과 해좌 정범조가 썼고 행장은 학사 김응조가, 묘갈명은 약산 오광운이, 묘지명은 홍문관 부제학 권해가, 신도비명은 용재 조경이 각각 지었다. 조경(趙絅)이 지은 비명(碑銘·국조인물고 권62 노난시 입절 정토인(虜難時立節征討人) 중)에는 "옥설(玉雪) 같은 지조로 염결(廉潔)을 지켰으며 철석(鐵石) 같은 심장이어서 여러 명기(名妓)들도 마음 사로잡지 못하였네. (임진왜란 때는) 분발하여 우뚝히 일어나 경주(慶州)를 방어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백발 펄펄 날리며 적진(敵陣)에 보내져 청(淸)나라 오랑캐 억제하였네. 처음에는 나의 뜻이었고 끝에 가서는 나의 절의였다네. 뜻과 절의 돌아가듯 죽음을 보았다오. 어디에 죽음이 없으랴만 그 충절 높이 뛰어났도다. 늠름한 그 정백(精魄) 언양의 땅에 묻혔는데, 장사지내지 못하였을 때 밤마다 긴 무지개가 우성(牛星)과 두성(斗星) 사이를 꿰뚫었네"라고 기록돼 있다. 백성을 버리고 파천(播遷·임금의 피난)을 했던 선조와 반정(反正) 후 실정을 거듭했던 인조도 그에게는 모두 조선의 군왕이었다. 그들 군왕은 이제 사가들에게서 혹평을 받고 있지만, 그들을 보필하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장군을 후세는 우성(牛星·견우성)과 두성(斗星·북두칠성) 보다도 더욱 빛나는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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