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김영호 교육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교수직에서 퇴임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막상 귀한하고 보니 그 사이 보낸 세월이 비록 다소 힘이 들었더라도 행복했던 것 같았다. 항상 바쁜 듯 쫓기며 넥타이를 두르고 급히 나서야 했던 출근의 의미가 새로운 값어치로 정가(定價)되고, 강의, 생활지도, 연구논문, 저술, 보직업무, 신입생 유치, 산학협동 등에 분주했던 과업수행에 몸살이 나곤 했지만 그것은 값으로 따질 수없는 진가의 행복이었던 같다.
가버린 세월을 다시 오게 하는 가역적 조작이 불가능한 것이 인생사라지만 묘방이 있다면 만 가지 처방이라도 다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일상을 무위도식 하며 잔여 노청(老靑)을 허망이 소모할 것 없다는 생각에서 그동안의 불효를 뉘우치며 추원보본의 길을 찾아보다가 선왕의 위패를 모신 전릉의 수호 및 대제의 책임을 맡아 수행하는 전 참봉에천거되었다.
일찍이 선조께서 전을 지을 때 참여하였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불비한 자질을 틈틈이 수양하는 것은 필요한 것 같아서 그 한 방안으로 문화유적지를 탐방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10여명의 능참봉과 더불어 왕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 숭인전 경천묘 등을 배알하고, 도동서원, 옥산서원, 임고서원, 회연서원, 동락서원 등 각처에 산재한 서원을 참배하며 전통마을을 찾아가서 다른 성씨들은 현조를 어떻게 모시는가에 대해 알아보려고 견학을 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낙동강 가에 위치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동락서원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낙동강의 넓은 강폭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인동마을에 새로운 문화질서를 확립하는데 대공을 이루게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여헌 선생께서 생세에 이룩한 학문적 업적은 물론 당시 왕으로부터 30번이 넘는 교지를 받았으나 대부분 불수(不受)하고 학문에 심취하여 진리를 탐구하면서 전국에서 모인 355명의 문도를 거느리며 후학을 길렀다는 사적 때문이다.
조준에 의하면 "여헌은 영남의 선비 가운데 현자로서 학문과 덕의가 성대하여 제유들이 바라보아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라고 극찬하였으니 오늘날도 1000명에 가까운 후손과 유자들이 사단법인 여헌학연구회를 조직하여 유업을 계승하면서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연구발표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여헌 선생은 8세에 부친상을 입고 소찬만 먹으면서 3년 치상(治喪)하였으며 진성으로 어머니를 시봉한 효자였다고 한다. 38세에 모친을 또한 여위었으며 39세 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신주를 모시고 상주의 몸으로 피난을 하면서 설상가상으로 병고에 시달리며 15년을 불우하게 사셨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탁월한 총명으로 10세 때는 숙지한 효경의 도를 다하였다고 하며, 18세에 '우주요괄'을 지었다고 한다. 여헌 선생의 저술은 '역학도설', '이기경위설', '태극설', '우주설' 등이 있으며, 이들 저술에 담긴 주요내용을 쉽게 간추릴 수는 없으나 "자신이 나그네가 된 것은 한 작은 나그네에 불과하지만 만약 천지를 관찰한다면 천지 사이에 붙어사는 모든 물건이 어느 것인들 나그네가 아닌 것이 없다"라는 말씀이 불후의 가르침으로 전해오고 있다.
인간의 도리는 나그네가 자신이 기식(寄食)하고 있는 주인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천지 사이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당위(當爲)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 그 답일 것일까. 관직을 사양하고 나그네로 자처하며 여헌이라 자자(自字)하여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참 나그네의 삶이라 하였으니 선생의 가르침은 상천(上天)을 바라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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