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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로金城路에서> 이회영 선생은 '더 이상' 月城李氏가 아니다
강병찬 문화부 차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6년 01월 19일(화)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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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강병찬 문화부 차장 | | ⓒ 경북연합일보 | | 고전에는 학식이 높고 인격을 갖춘 큰 부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회에 헌신하기가 쉽지 않다고 씌어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선에서 봉사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귀족 중에 모든 것을 티끌 같이 내려놓고 하늘의 뜻을 땅에 실천해 성자의 반열에 드는 위인이 매우 드물게 있다고 적혀있다. 반대되는 이야기도 있다. 적군이 쳐들어와 성이 함락 직전에 있었다. 성을 오르내리며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았던 한 노비가 적의 정세를 유심히 살펴보고 방안을 찾아냈다. 현장에서 해답을 찾았던 것. 하지만 하잘것없는 노비가 내놓은 계책이라는 이유로 그것은 묵살됐다. 결국 성은 함락돼 성주는 눈알이 파인 채 사슬에 끌려 포로로 잡혀갔다. 이처럼 귀족들의 사회적 책임은 어느 구성원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적으로 왕조가 망할 때 귀족과 토호들의 패악이 하늘을 찔렀다고 다반사로 기록돼 있다. 반면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는 희생정신으로 국가를 세우고,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귀족을 우리는 위인이라 일컬으며 칭송한다. 이들이 모함을 받아 당대에 고통을 받았다면 후세는 그를 더욱 애틋하게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다. 성씨의 고향인 경주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탁월한 인격과 실천으로 역사를 써나간 귀족 중의 귀족, 명문 중의 명문가가 있다. 경주(월성)이씨의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신라 6촌의 수장으로 화백회의를 주재했다. 박혁거세를 옹립해 신라를 세우고 아찬에 올라 군무를 맡았다. 박혁거세와 버금가는 권력가였다. 그는 화백회의의 기틀을 세우고 끝까지 유지했다. 화백회의는 양보와 타협을 의미하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요체다.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인물이다. 그는 전란 중 다섯 번의 병조판서, 탁월한 외교가였고, 영상에 올라 전후복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농담정승'이라 기록될 만큼 해학이 뛰어나 민초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정치적 화합을 도모하다 모함을 받았고, 대의명분을 지키려다 결국 유배형을 받아 유배지서 사망했다. 그의 호 '백사'도 왕이 직접 내린 것으로 '청백리'의 표상이다. 우당(友堂)이회영(李會榮)은 1867년 서울에서 이유승의 여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정치적 이유로 남북한 양쪽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행적이 요사이 재조명되고 있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오기 어려울 만큼 그는 높은 인격을 가졌고 온몸을 불살라 실천한 인물이다. 그의 여섯 형제들은 서울 종로의 2만평에 달하는 가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는 성인이 되면서 집안의 노비에게 존대를 했고, 자유를 주었다. 독립협회, 신민회, 상동교회 청년학원, 헤이그밀사, 을사오적 암살모의, 고종망명 계획을 세웠다. 신흥강습소에서 시작한 신흥무관학교, 의열단, 신흥학우단, 다물단을 이끌었다. 김좌진과 함께 결성한 재만한족연합회를 비롯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한인연맹, 남화통신, 흑색공포단, 중국인과 함께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상하이북역사건, 아모이·텐진 일본군 영사관과 군수수송선 폭파 등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11월 65세에 중국 대련(다렌) 일본군 감옥에서 피살됐다. 1962년에야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중국정부는 2000년에 항일혁명열사증서를 주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더 이상 월성이씨가 아니다. 모든 것을 국가와 국민에게 바친 그를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은 '민족의 어버이'로 받들어야 하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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