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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28일(일)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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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박정웅 행정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고대 희랍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무지(無知)에 대한 자각(自覺)을 일깨우기 위한 실천지(實踐知)로서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다. 인간의 간사한 자기 무지를 스스로 자각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지침으로서 무지에 대한 자각적 실천을 깨우치기 위한 경구이다.
이러한 성현들의 가르침은 일상에서 사람의 모든 행위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적 삶에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국가적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으나 삶의 가치체계에서 누릴 수 있는 가치 기준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기준의 중심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삶을 영위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사회가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섬에서 홀로 살아가는 처지가 아니라면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생활을 독립적으로 영위하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법적권리를 헌법에 명시하여 두어기에 정치적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
즉, 국민은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게 대접받기에 자유로운 사회생활을 법으로 보장받고 있는 국가이다. 또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三權)의 분립으로 국가 질서가 유지되며, 국가를 지탱하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주어지며 권력의 집행은 국민권력 위임에 의한 권력의 대행으로 이루어진다. 즉, 선거로 선택된 정치지도자들이 국가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그들의 무소불위의 작태는 마치 개인적 역량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 속에서 국민을 농단하고 있는 꼴이다.
이즈음 선현들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인간됨의 자세를 익혀 본다면 우리 사회 지도층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될 것이다. 먼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 첫머리에 있는 자왈(子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不亦說)호(乎)아” 라는 공자의 말씀을 새겨보자.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완성을 과신하기 보다는 겸허하게 상대를 대하는 마음가짐의 자세를 우선 익혀야 한다.
여기서 학습(學習)은 배워 본받고 그것을 배우기에 그치지 않음이다. 이 형상은 마치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가 파닥거리며, 연습을 반복하다가 스스로 나는 것을 익혀 자유롭게 창공을 날며 기뻐하는 것과 같다. 배우고 또 익힌 것에 자기 스스로 확신을 바탕으로 지도자로서의 자기처신을 한다는 것이 본래의 인간됨이 아닐까.
모름지기 대중 앞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평가된다는 바를 명심하고 말과 행동에 임하는 것이 사회적 지도자의 본(本)이 아닌가.
여기서 습(習)은 거듭하는 것이요, 때로 다시 생각하여 가슴 속에 머물게 하는 기쁨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학습, 즉 배우고 또 그것을 익힌다면 배움이 익숙해져서 자신의 행위가 대하는 사람에게 닦아가서 기쁨으로 받아드려지고, 익힌바를 다시 반복한다면 익숙해져서 그 행위의 중심에 희열을 느껴 진지함이 자연히 배어나서 자기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정치권 주변에서는 어디서 인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남발하거나 막말로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작태는 그 미숙함이 듣는 이로 하여금 염증을 내게 하는, 이른바 자신의 무지가 드러남을 알아야 함에도 함부로 쏟아 내는 것이 자신의 자랑인양 말하는 꼴이 한심스럽다.
사람은 항상 정제(精製)된 자기완성을 통하여 군자(君子)로서의 덕(德)에 힘쓰는 행위의 근본으로 학습된 도(道)가 생활의 주축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가짐이 인(仁)을 행하는 행위의 근본에 힘쓰는 자세로 상대를 의식하는 올바른 내재된 인식을 길러야 함이 특히 사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층의 할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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