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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가뭄과 기우제(祈雨祭)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18일(목)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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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김영호 교육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기우제는 가뭄이 극심할 때 비가 내리기를 바라며 비는 제사이다. 요즈음은 비가 오래토록 내리지 않아 한발이 심하여 모가 타들어가고 농업용수가 부족하여 아직 모내기를 못한 곳이 있고, 여러 지역에서 식수원까지 고갈하여 물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저수지는 물이 말라 바닥이 보이고 있어서 옛날처럼 기우제를 지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비가 오래도록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만이 아니라 물 부족 때문에 인간의 생명까지 위협을 받게 되어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다. 비에 대한 관심은 환웅이 풍백·우사(雨師)·운사를 거느리고 내려왔다는 기록이 '단군신화'에 보이고, 「삼국사기」에도 시조묘와 명산대천 등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직접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고려사절요」권4, 정종 2년 조에 기우제를 지내는 예법이 기록되어 있어서 기우제도 아무렇게 지낸 것이 아니라 예법에 따라 지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기우제는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에 지내는 연중행사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축문을 읽었다.
조선 세종 5년(1423년) 7월 13일에 지낸 국행기우제 축문에서 "삼라만상은 가뭄에 시달려 고사하기 직전 이옵고, 억조창생들은 하늘을 우러러 단비를 갈구하기 어느덧 반년이옵니다. 임금 된 자가 덕이 없으면 삼재팔난(三災八難)으로 나라를 괴롭힌다 하였으니 혹 이 소자 도(세종의 이름)의 부덕으로 인한 벌책을 내리시옴인저, 여기 염천에 면류관·곤룡포로 벌을 서옵나니 일체 허물을 도 한 몸에 내리시고 단비를 점지해 주옵소서."라고 빌면서 가뭄을 국정책임자인 왕의 부덕으로 생각하고 친히 벌을 선다하였으니 가뭄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중국 고사에도 가뭄에 대한 이야기가 「춘추좌시전」에 전해 온다. 노나라에 비를 기원하는 무녀인 무왕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녀는 불구자로서 얼굴을 바로하지 못하고 항상 위를 쳐다보고 있어서 비가 오면 콧속으로 빗물이 들어가서 죽기 때문에 하늘이 가련하게 생각하여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이다.
노나라 민공이 시해 당하자 제19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라 33년간 통치한 희공이 여름에 가뭄이 들었을 때 무왕을 죽이면 비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태워 죽이려 하였는데, 이 때 노라의 대부인 장문중이 그것은 가뭄을 극복하는 올바른 대책이 되지 못한다고 반대하였다.
"하늘이 무왕의 죽음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녀가 만약에 가뭄을 가져오는 원인을 제공하는 자라면 그녀를 태워 죽이는 것은 가뭄을 더욱 심하게 할 수 있어서 가뭄에 대한 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곽을 수리하고 먹는 것을 덜며 쓰는 것을 절약하여 검약에 힘쓰게 하거나, 부자들이 가진 것을 나눠주도록 권유하는 일이야 말로 마땅히 힘쓸 바입니다. 무녀나 곱사등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장문중은 진언을 하였던 것이다. 희공은 그의 말이 타당한 것 같아서 따랐다고 한다.
물 부족으로 목이 타는 백성이며, 산야 개천에 죽어가는 동식물을 볼 때, 임금도 마음이 편치 않아 그것을 자신의 부덕으로 간주하고 기우제를 지내며 천지신명에게 죄주기를 빌면서 단비를 갈구한 역사의 기록은 비에만 해당하는 의미를 포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임금의 잘못된 대책은 불쌍하고 선량한 백성까지 죽일 수 있다는 중국고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뭄 극복을 위해 자치단체장이 노력과 정성을 다하고 있지만, 메르스 괴질을 멸균시킬 묘방이 관수세수가 우선이라 하니, 가뭄 극복도 자기처방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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