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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총(鼻塚)을 생각해 본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11일(목)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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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김영호 교육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요즈음 토요일에 방영되는 '징비록(懲毖錄)'은 상연할 목적으로 쓴 극문으로서의 드라마이기보다 국사교육이라 여겨진다. 「징비록(懲毖錄)」은 서애 류성룡(1542-1607)선생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가열 처참하였던 임진왜란을 당해 전시 수상(首相)과 도체찰사 등 군국(軍國)의 중책을 맡아 국가와 민족을 폐망의 위란에서 구출하고 전쟁이 종료가 될 무렵에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인 하회로 돌아와 전란 중에 겪었던 전황을 회억 고찰하여 저술한 역사적 교훈서이다. 책이름을 「징비록」이라 지은 것은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뒤에 근심이 있을 까 삼간다(予其懲 而毖後患)'는 「시경(詩經)」의 문구에서 따온 것이라고 자서(自序)에 밝히고 있다.
류성룡선생의 저술인 「징비록」을 각본 하여 KBS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방영하는 TV연속극은 오늘날 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일부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는 인기 있는 드라마라 생각된다. 임진왜란은 풍신수길이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전쟁이었다. 그는 일본 본토에 있으면서 전쟁 상황을 지켜보며 작전을 명하다보니 올바를 전공을 파악하기 어려워서 조선인의 코를 잘라 오라고 명했던 것이다. 코는 사람마다 한 개 뿐이므로 잘로 온 코의 수가 많을수록 전공이 많은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코를 모아 만든 무덤이 비총이다. 이 비총은 794년부터 400년간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서울이었던 교토에 있다. 교토는 많은 유물 유적이 있는 데, 그 가운데 산주산케도(三十三間堂)에는 1001구의 목조천수관음 입상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인접한 곳에 도요쿠니 신사가 있고, 이곳은 풍신수길을 신처럼 모시는 곳이다. 이 신사에서 길을 건너면 놀이터가 있는 데 그 옆에 '비총(鼻塚)' 즉 '코무덤'이 있다.
이 코무덤은 일본군이 조선인의 코를 잘라 2000개씩 소금에 절여 온 것을 모아 묻은 것이라고 한다. 소금에 절인 것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베어온 코의 수가 십여만 개에 이른다고 하니 그 잔인성이 얼마나 극악했던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코가 잘린 조선인들은 병사 외에 선량한 어린 아이, 부녀자, 노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코 숫자를 높이기 위해 노유(老幼)를 가리지 않고 살육하였다니 그 장면은 얼마나 처참하였을 것인가.
특히 코를 베어 오면 '코영수증'을 발행하였다는데, 그것도 가짜가 많이 나돌아서 정확한 실적 파악이 어려웠다 하니, 현대 행정에서 공적을 중시여기는 매맅(merit) 시스템의 단점이 이때에도 나타난 것이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풍신수길이가 이 코무덤을 만들어 놓고 승려들을 시켜서 '불쌍한 조선인을 위한 공양'을 한다는 뜻으로'공양의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때 세운 비석의 글자는 비총(鼻塚)이라 각자가 되어 있었다. 그 후 애도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젊은 피 아야시 라산(林羅山)이 비총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 잔인하니까 귀무덤(耳塚)으로 부르자고 하여 현대까지 이총으로 불러져왔다.
이곳을 관광차 다녀왔던 뜻있는 한국인들이 죽은 이들의 원한을 생각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역사왜곡현장을 목도하고 다수가 항의하여 오늘날은 표지판을 '耳塚(鼻塚)'이라고 고쳐 썼으나 이것으로 어찌 구천을 떠도는 원혼을 위무할 것인가. 역사는 있어온 사실의 기록이고 이 기록이 올바를 때 정사가 되는 것이고, 정사는 교훈을 후대에 전해주어서 삶의 정향을 찾게 해 줄 수 있지만, 잘못 기록될 때 후환의 문제가 발생하여 시끄러운 세상이 되는 것 같다. 왜곡된 역사 때문에 한일관계가 소원해 지고 있으니, 현충의 달에 비총을 생각하며 요배(遙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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