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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조명한 관창의 죽음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07일(일)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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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최형대 사회복지학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제60회 현충일을 맞아 황성공원 현충탑에서는 경주를 대표하는 각 기관의 장을 비롯한 관계 인사들과 참전용사들, 참전피해 가족들 그리고 시민들이 모여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 정신과 영령을 추모하는 행사가 있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만 유교이념을 특별히 숭상하여온 우리민족은 충과 효를 사회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덕목으로 받아들여 실천하였다. 국가는 이를 통치의 기반으로 하여 국가를 지탱해 왔으며, 백성들은 충효를 위한 자기 절제와 자기희생을 별난 일탈적 행위가 아닌 군자의 당연한 행동덕목으로 실천하였다.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려고 자기희생을 실천하신 선열 께서도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몸과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란 구절의 함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뒤에 이어지는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후세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끝이니라"라는 구절을 상위 가치로 실천하였다.
이차돈의 순절과 관련한 '흰 피 이야기', 문무대왕이 대왕암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호국용'이 되었다는 이야기, 신문왕의 '만파식적 이야기' 등 신라 경주는 호국과 관련한 귀감적 이야기들이 특히 많다. 여기서 국력이 가장 미약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여 최초 통일민족국가를 형성하여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라의 통일국가형성 원인 중 에서 무엇보다 호국의 달에 깊은 감명과 함께 되새겨지는 이야기는 '화랑 관창의 순국이야기'이다. 화랑도로서 화랑교육을 받은 관창은 품일(品日)장군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폭넓게 사귀었으며, 660년에 왕에게 천거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고자 출병할 때, 좌장군인 아버지 품일 장군 밑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였다. 이 황산벌 싸움에서 신라는 4차례 전투에서 모두 백제의 계백(階伯)이 이끄는 결사대에 패하여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질 뿐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 관창을 불러 "오늘 싸움에서 네가 능히 모범이 되겠는가?"라면서 그를 사기앙양용의 희생양으로 삶아 단신으로 나가 싸워 전사케 하였다. 관창은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여 마침내 계백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베어진 그의 머리만 계백의 선처에 의해 말 안장에 매달려 신라군에게로 되돌아왔다. 품일은 관창의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로 옷깃을 적시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면목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다. 나랏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본 신라군은 비분강개하여 진격하여 계백을 전사시키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관창은 부친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여 효를 실천한 동시에 국가를 위해 순국하였으니 충과 효의 모범이 되었다. 관창이 단신으로 말을 몰아 목숨을 버리기 위해 적진으로 돌진할 때에는 그는 분명 원광법사의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이나 사친이효(事親以孝: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임전무퇴(臨戰無退: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로 표현되는 세속오계를 되 뇌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랑이자 국가의 엘리트적 동량으로 국가보위의 임무수행과 동시에 효성 지극한 자식으로서 또한 충성스런 신하로서의 각각 역할에서 오는 내적 갈등을 사명감으로 극복하였다. 삶과 부귀영화보다 상위의 실천적 가치로 국가와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 이타적 희생을 택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엘리트들과는 차별적인 행동이었다. 현충일, 관창과 같은 길을 가신 이름 없는 그분들의 이름을 찾아 사고와 묵념의 여행을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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