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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불망언(銘心不忘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04일(목)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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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김영호 교육학 박사 | | ⓒ 경북연합일보 | |
유림단체에서 호국 보훈의 달을 앞두고 임진왜란 때 향민을 지키고 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목숨 바친 선열의 위패가 모셔진 충렬사를 찾아 참배하였다. 충렬사는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절제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을 비롯하여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에 온 시민의 정성으로 향사를 올리는 사우이다.
5월이 마지막 가는 날인데 날씨는 고온의 한여름이었다. 참가한 회원은 모두가 70대중반을 상회하는 연치이고 그중에서 약70%는 망구의 상로에 속하는 분들이었다. 많은 분들이 정상보행 자세를 취하기보다 좌우 경사진 모습으로 리듬식 힘든 행보를 하면서 열한을 흘리며 충렬사를 찾은 것이다.
깨끗한 거실 소파에 기대어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조용히 쉬는 것이 훨씬 편안한 소일이 될 것 같은데 그것을 포기하고 호국영령을 찾은 것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버스 주차장에서 충렬사 사우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하는 상행의 순한 비탈길이었으나, 깨끗하게 다듬어진 길이며 울창한 수목이 맑은 향기를 뿜어주고 아름다운 꽃들이 연지 빛 은은한 볼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곱게 피어 있어서, 전쟁에 몸 바친 선열의 체백을 안무 하는 듯하였다.
조선 선조 25년에 일본군이 침입하여 만6년 간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된 임진왜란은 국제 전쟁이었다. 당시 절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일본군이 침입했다는 정보를 듣고 급히 부산진으로 돌아온 부산 첨사 정발은 곧 뒤 따라 온 일본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그 여세를 몰아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우면서 일진일퇴 하다가 화살이 다하고 칼이 부러져 마침내 관민 모두가 피살 되었다고 한다. 동래로 몰려 온 소서행장이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고 요구하자 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글을 목판에 써서 적중에 던지고 성과 운명을 같이 할 뜻을 다짐하고 성중의 군민을 이끌고 항전했으나 조총을 쏘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본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동래성 군민들은 활살이 떨어지자 지붕의 기와를 뜯어 던지면서 사력을 다하며 끝까지 싸웠던 것이다. 부사 송상현은 적이 성안으로 침범하자 피하라고 권유하여도 피하지 않고 성이 함락될 무렵에 조복으로 갈아입고 북방요배(北方遙拜)를 마친 후 부친에게 하직의 시를 남기고 의연한 자세로 단좌(端坐)한 채 적병의 칼날을 맞고 사절(死絶)하였던 것이다. 이 장면을 지켜 본 왜장도 송부사의 높은 충절에 감복하여 해친 자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전사이 가도난'이라. 비록 한 줄의 짤막한 문장이지만 나라를 위해 결연히 목숨 바친다는 강렬한 충의가 담긴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임무를 다하다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관복을 차려입고 임금을 향해 망배를 올린 다음에 아버지께 먼저 떠나는 불효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하직인사를 하였다 하니 이 충효양전(忠孝兩全)의 절의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나누어 준 안내 책자를 넘기며 일행 모두가 '전사이 가도난'를 외우며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전사는 싸우다가 죽는 것으로 이것은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나라의 길을 빌려주는 것은 개인이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개인의 목숨보다는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호국보훈의 달에 깊이 명심해서 잊지 말아야 할 말씀(銘心不忘言)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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