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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탱크 육탄 폭파…낙하산 추락 동료 극적 구조
이명수 상사
낙동강전선 필사적 방어…포항 점령 계획 저지
전공 세워 사병 최초로 태극 무궁훈장 '영예'
이원등 상사
동료 구하고 자신은 순직…살신성인 정신 기려
초등 교과서에 고귀한 희생정신·책임감 수록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02일(화)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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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이명수 일등상사 | | ⓒ 경북연합일보 | | ◇영덕 이남까지 밀린 방어선 ^ 1950년 7월 28일 영덕지구 전투에서 영웅적인 행위의 주인공 이명수 상사는 1927년 6월 19일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했다. |  | | | ↑↑ 이원등 상사 | | ⓒ 경북연합일보 | | 1946년 10월 국군에 자원입대한 그는 강릉에 주둔하던 제8연대 3대대 9중대에서 근무하고 제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등상사로 재임용돼 제3사단 22연대 3대대 12중대 2소대장 대리로 복무했다. 당시 북한군 제2군단은 낙동강 전선을 동측방에서 공격, 대구와 부산의 길목을 차단하려는 목적 하에 신속히 포항을 점령하려 했다. 이를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국군 제3사단의 분전은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 보루인 낙동강선 방어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관건이었다. 따라서 포항 북쪽의 영덕과 강구는 아군이 반드시 확보해야할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간지점에 위치한 181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혈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1950년 7월 10일 평해에서 철수, 영해에서 재편성을 하던 제3사단 22연대와 독립 제1대대로 영해-영덕간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단은 축차지연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영해 남방 목골재-가마실에서 진지편성에 들어갔다. 반면에 북한군 제5사단은 계획보다 늦게 영해에 진입한 후 영덕을 목표로 제11연대와 제12연대는 해안도로로, 제10연대는 진보-청송 방향으로 우회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북한군 제5사단이 14일부터 영해 남쪽 진지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면서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방어진지가 돌파됐다. 축차진지로 철수한 아군은 영해-영덕간 교량과 터널 및 도로를 파괴하는 등 적의 진출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16일 자정 무렵 계속적인 적의 추격과 공격으로 인해 저지선에서 진지를 강화할 틈도 없던 아군의 진지가 돌파될 위기에 직면하자 다음날 오전 사단장은 영덕에 적이 진입하면 해·공군의 화력으로 영덕을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연대를 영덕 이남으로 철수시켰다. ◇유엔 해공군 지원, 영덕 재탈환 ^ 이에 따라 제23연대는 영덕 남쪽 181고지와 207고지에, 독립대대는 208고지에 배치됐다. 이날 저녁 적 제5사단이 영덕으로 진입하자 포항의 전투비행대대와 유엔함대는 18일 미명을 기해 영덕 시가지 및 주변 일대를 강타해 영덕 북방으로 몰아냈다. 다음날 적의 공격으로 영덕을 다시 상실했다.23일 저녁 적은 영덕 이남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의 초점은 제23연대의 주력이 배치된 181고지였다. 이 고지는 서북쪽 2.5㎞의 영덕과 남쪽 4㎞의 강구에 달한 지구를 제압하는 중요지역으로서 제3사단이 이 고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영덕-강구간의 주보급로가 차단돼 전선조정의 기회를 잃을 수 있었다. 24일 대구에서 재편을 마친 제22연대가 강구에 도착하자 사단장은 이들을 181고지와 207고지탈환에 투입했다.25일 저녁 고지탈환전에 나선 제22연대는 다음날 12시부터 1시간 동안 유엔 해공군의 강력한 함포사격에 힘입어 큰 저항 없이 제3대대가 181고지를, 제2대대가 207고지를 재탈환했다. 그리고 영덕탈환에 나선 제3사단이 27일부터 유엔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 삼면합동작전을 수일간 지속하자 완강히 저항하던 적은 영덕 북방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마침내 제3사단은 8월 2일 18시에 영덕을 탈환했다. ◇"무소불위 북한의 전차를 폭파하라" ^ 영덕 북방 2㎞ 지점까지 진출하면서 적을 격퇴하고 진지를 회복한 제22연대와 제23연대는 적 전차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적은 대전차화기를 보유하지 못한 아군의 약점을 이용, 전차를 앞세워 아군의 진지를 돌파할 계획이었다. 제22연대 3대대장은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적 전차를 파괴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이명수 일등상사에게 이를 지시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이명수 일등상사는 소대원 12명으로 특공대를 편성하고 "우리 특공대의 임무는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 것이다. 우리가 임무를 완수하면 현 진지를 계속 방어할 수 있지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포항까지 후퇴하거나 동해안의 물귀신이 되어야 한다. 필승의 신념으로 임해주기 바란다"라고 대원들을 격려한 후 각자에게 수류탄 5개씩을 분배했다. 7월 28일 오후 9시 10분 그는 3개조 나눈 특공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출발했다. 적의 활동상황과 적 전차의 위치탐색을 위해 야음을 이용, 적진을 침투하던 특공대가 3㎞쯤 진입했을 때, 어느 계곡에서 1개 소대정도의 적이 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수통에 물을 담는 장면을 목격했다. 수류탄으로 이들을 공격하기로 한 그는 각 조별로 최근거리까지 접근한 후 수류탄을 투척하도록 명령했다.수류탄과 소총사격으로 제압된 적은 대항할 겨를도 없이 대부분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10여 명은 포로가 됐다. 심문을 통해 적 제5사단 10연대 본부 및 적 전차 3대의 위치, 당일 암구호를 알아낸 그는 적군 복장을 하고 협조적인 포로 3명을 앞세우고 적 전차를 향해 전진했다. 적 경계병과 수차례의 암호를 교환하는 등 적 경계병을 기만하며 침투하던 특공대는 은폐돼 있는 3대의 전차를 발견했다. 그는 "제1조는 1번 전차, 제2조는 2번 전차 그리고 제3조는 3번 전차를 격파하라"고 임무를 분담시키고 목표 전차로 접근했다. 포로들을 이용해 적 전차장을 밖으로 유인한 그는 각 전차장이 해치를 열고 나오는 순간 3~4발의 수류탄을 포탑 내부에 투척했다. 밤하늘을 찢는 굉음이 연달아 세 번 울림과 함께 적 전차가 폭파됐다. ◇적의 남하 저지…낙동강방어선 형성 ^ 특공대원들은 폭음을 듣고 달려온 적과 30분간 교전하며 후퇴를 계속해 183고지 동쪽 기슭에 다다랐으나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적과 만나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아군 제11중대 진지로 무사 귀환했으나 일부 대원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포로가 됐다. 날이 밝자 그는 183고지 재탈환을 위한 특공대에 자원해 특공대장이 됐다.29일 새벽 7시에 공격을 개시한 특공대는 가까스로 고지 정상의 30m 전방까지 접근해 수류탄으로 적의 화력을 제압하고 돌격을 감행, 적을 제압한 후 생포되었던 2명의 특공대원과 다른 국군포로들을 구출했다. 제3사단 22연대를 비롯한 아군으로부터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북한군 제5사단은 8월 4일까지 진출이 좌절돼 7월 26일까지 포항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완전 수포로 돌아갔다. 포항 진출이 2주일 이상 지연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 형성이 용이하게 됐다.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공을 거둔 이명수 상사는 1951년 7월 26일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사병으로서는 건군 이래 최초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는 영예를 누렸다. 1934년 5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이원등 상사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해동중과 영남상고 2년을 고학으로 수료한 후 1956년 7월에 입대, 부사관이 됐다. 1959년 1공수특전여단에 전입해 공수 기본 6기 교육과정을 수료했다.1961년에는 미국 포트리군사학교 낙하산 정비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한국 최초의 스카이다이버가 됐다. 153회의 공중낙하 기록을 보유했다. 1966년 2월 4일 이원등 상사는 1공수특전단 강하조장으로서 교육생을 이끌고 C-46수송기에 탑승, 한강 상공에서 고공침투훈련을 지도하고 있었다. 6명의 대원들이 차례로 강하한 후 상공 4천500피트 고도에서 마지막으로 하강하던 이 중사는 바로 직전에 낙하한 김 중사가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추락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낙하산을 빨리 펴주지 않으면 추락해 목숨이 위태로운 위급한 상황이었다.이때 이 상사는 고도로 숙달된 스카이다이번만이 할 수 있는 사선 이동의 방법으로 추락하는 대원에게 접근해 능숙하게 그의 낙하산을 고쳐서 펼쳐 주었다. 그러나 동료를 구하고 벗어나는 순간, 순식간에 펼쳐지던 동료의 낙하산 줄에 오른팔이 부러졌다. 그는 이미 지상에 너무 접근한 상태라 낙하산을 펼칠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한강 얼음판 위로 추락해 순직했다. 정부는 부하를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이원등 중사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려 1계급 특진과 1966년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했다. 육군은 1966년 6월 한강 중지도(노들섬)에 고인의 동상을 건립했다. 또 군인으로서의 투철한 책임감으로 임무를 다하고 희생한 그의 스토리를 육군 정훈교재에 수록했다. 1971년 교육부는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에 이원등 상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실어 후대로 하여금 교훈으로 삼게 했다. 강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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