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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퇴로 사수…이화령 꽃 되다
호국영웅 <중> 김용하 소령ㆍ박두원 대위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02일(화)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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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故 김용하소령 | | ⓒ 경북연합일보 | |
이화령의 꽃이어라...경주 김용하 소령 국군 퇴로 지키려 장한 목숨 던져 ◇인민군 남하 저지...문경 사수 안간힘 인민군의 남하에 밀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은 미 지상군의 참전과 더불어 차령산맥에서 전선의 정비를 도모하는 한편 제천-충주-진천-평택을 잇는 북위 37도선에서 저지선을 형성하려 했다. 그러나 중서부지역으로 남진한 적이 차령산맥을 돌파하자 국군은 다시 소백산맥과 금강을 연하는 선에 전선을 형성하고 지연전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이에 따라 제6사단은 문경지역을 담당해 북한군 제1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게 됐다. 이 지역은 충주에서 문경과 점촌을 거쳐 상주에 이르는 중부의 주요 지역으로서 이곳이 돌파될 경우 낙동강선까지 물러설 수밖에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소백산맥의 줄기인 1천m 내외의 준봉과 죽령-조령-이화령-추풍령 등이 이어지면서 횡벽을 이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1950년 7월 10일 11시, 육군본부로부터 문경지역 사수명령을 받은 사단장은 사단지휘소를 문경국민학교로 이전하고 수안보 일대의 주력을 축차적으로 철수시켜 제19연대를 우측인 조령에, 제2연대를 좌측인 이화령에 배치하기로 계획했다. 이화령 방어임무를 부여받은 제2연대는 야간 도보행군으로 7월 13일 밤 2시에 진지에 도착해 거점을 확보했다. ◇오리무중 격전 속...후퇴하는 국군 다음날 저녁 무렵 북한군 제1사단은 제2연대 정면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비교적 부대 기동이 용이한 문경-점촌간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짙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적의 포탄은 진지에 집중됐다. 이를 이용한 적은 진지로 몰려들었다. 한 치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 속에서 적이 진지에 뛰어들면서 진내 백병전이 전개됐다. 피아 구분이 어려운 상황에서 양측은 머리를 만져보아 머리칼이 잡히면 아군이고, 삭발이면 적으로 판단해 무차별 육박전을 감행했다. 제1선에서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 이화령의 관측소에서 전방을 살펴보던 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진지의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총성은 무성하였지만, 진지가 구름과 안개에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무선마저 두절돼 있었다. 새벽 7시 께 안개가 점차 걷히며 북쪽 능선이 시야에 들어올 때쯤 연대장은 진지를 고수할 것으로 믿었던 아군이 이화령 쪽으로 철수하는 것을 목격했다. 연대장은 진지고수를 외치며 이화령 동쪽에 배치된 제1대대장을 전화로 불러 역습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직접 진두에서 역습을 지휘한 끝에 80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7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장갑차 3대와 전차 10대, 75mm 야포 3문과 각종 소화기 10여 정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제2연대가 이화령을 다시 점령하였을 때, 우측의 제19연대는 연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조령 제1관문과 제2관문에서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적세에 밀려 방어의 요충인 조령을 포기하고 문경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제19연대가 고전을 하는 동안 제2연대는 이화령 진지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특히 진지 서남쪽의 분지리 계곡을 통해 북한군 대열이 계속 문경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연대의 측방이 위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퇴로마저 차단될 위협에 직면했다. 이에 연대장은 제2대대를 갈미봉 쪽으로 재조정해 배치하는 동시에 요광리 부근의 제1대대에 결전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제2연대가 초조하게 전황을 지켜보며 이화령을 사수하고 있는 동안 우측 제19연대의 전황이 매우 악화돼 마침내 문경읍마저 적의 포격 사정권에 들게 됐다. 이에 사단장은 제2연대에 철수명령을 내렸고, 제2연대장은 제3대대의 엄호 아래 제1대대와 제2대대를 남호리로 집결하도록 조치했다. ◇"비상탄 두발 남기고 모두 발사하라" 제1대대장 박노규 중령은 중화기 중대장인 김용하 대위에게 화력으로 대대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지시했다. 중화기 중대장인 김용하 대위는 화력으로 전방의 적을 막아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게 되었는데, 대대 주력이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하자 적의 포격이 급증해 상황이 급박해졌다. 김 대위는 직접 요광리의 포 진지를 새봉의 갈림길로 추진하고 중기관총 진지를 이화령 고개마루턱까지 추진시켜 격렬한 화력 세례를 퍼부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능선에서부터 포화가 작렬하는 계곡으로 김 대위는 동분서주 뛰어다니면서 대원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박격포소대장 이주홍 중위에게 달려가 "비상탄 2~3발만 남겨놓고 모두 발사해 적을 격멸하라!"고 소리쳤다. 김 대위는 중대가 철수하기 전에 적에게 최대의 타격을 가하려고 했다.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던 김 대위는 1950년 7월 14일 우박처럼 쏟아지는 적 포탄의 파편을 맞고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김용하 대위의 전사소식을 접한 대대장 박노규 중령은 현장으로 달려가 오열을 터뜨리며 통분하다가 그의 시신을 양팔에 끌어안고 내려왔다. 1950년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전개된 이화령 전투를 통해 국군은 북한군 제2군단의 주력이 상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북한군은 국군의 전투력이 점차 회복돼 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 이화령 전투의 영웅인 김용하 소령은 1926년 11월 29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제6기로 입교해 1948년 7월 28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6·25전쟁 개전 초기 제6사단 2연대에 배속돼 홍천지구 전투와 충주 달천강 도하작전에서 많은 전공을 거뒀다. 그는 중대장으로 참전한 이화령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정부는 김용하 대위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육군 대위에서 소령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  | | | ↑↑ 故 박두원 대위 | | ⓒ 경북연합일보 | |
경주의 아들 박두원....조국 하늘의 불사조 되다 89회 출격, 미국방부 특별수훈장 수상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 1926년 7월 5일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서 출생한 박두원 공군 대위는 7세가 되던 해 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1943년 3월 사가현에 위치한 사가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1944년 9월에는 일본 다찌아라이 육군비행학교 조종과정을 졸업하고 조종사가 되었다. 조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1950년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다. 부산의 육군 헌병대에서 근무하던 중 상관들의 추천에 의해 간부후보생 16기로 입대해 1952년 3월 1일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학도병으로 지상전투에 참가한 가운데 아군에 전투비행대가 있다는 사실과 전투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직접 공군본부를 찾아가 작전국장을 만남으로써 1951년 7월 모국의 공군 전투조종사로서 새로운 사명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공군에 편입된 그는 간단한 비행훈련과정을 마치고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51 무스탕 전폭기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처음 조종사 생활에서 그는 한국말이 서투르고 일본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동료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그의 입대경위가 알려지고 전투출격이 거듭되면서 오히려 그의 서툰 한국말이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조종사들의 황폐한 마음을 씻어주는 청량제가 됐다. 특히 1952년 6월 28일에는 목표공격에서 명중탄을 퍼부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듦으로써 6·25전쟁에서 보기 드문 미 국방부의 특별수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전장에서 보낸 나라사랑 편지 그가 임관해 매일같이 출격을 감행하면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후배 조종사 이희근 중위에게 보낸 편지가 그의 사후 30년 만에 발견됐다. 그의 호국단심과 전투조종사로서의 용맹성이 잘 표현된 것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희근 군! 군이 보내준 글월은 나에게 끝없는 기쁨과 반가움을 가져다주었네. 너무나도 그리우면서도 편지 한 장 쓰지 못한 나의 허물을 용서해주게.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의연분투하고 있다니 무엇보다 다행일세. 나도 원기왕성하게 적군 격멸에 매진하고 있으니 안심하게. 다년간의 숙망이, 아니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밟아야 할 길을 걷게 된 자신을 돌아볼 때 이 감격을 누구에게 터놓고 나누어야 할지 모르겠네. 한번 출격하면 두 번하고 싶고, 세 번 출격하면 네 번째의 출격이 안타깝도록 기다려지네. 폭탄이 없고 로켓이 떨어지면 눈 아래 보이는 적 고사포를 발길로라도 짓밟아 버리고 싶은 마음 어찌할 수 없네. 곧 출격하게 되네. 희근이 날 믿어주게. 굳은 결의로 조국을 지키세. 이것은 조국이 우리 젊은이들에게만 맡겨준 위대한 사명이며 영광이 아니겠는가. 전쟁을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싶네. 침략자 공산무리를 격멸하고 내 조국 아니 자유민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한국청년의 긍지를 다하세. 그럼 다음을 약속하면서 건투를 비네. 1952년 4월 1일 두원"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우리는 구구절절이 배어있는 조종사로서의 투철한 사명감과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푸른 제복의 조종사로서의 긍지와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필승의 신념 그리고 조국과 자유민의 평화를 지키려는 그의 높고 순결한 사명감은 우리 군인의 진정한 표상이었다. ◇5개월 간 89회 경이적인 출격 그는 5개월간의 짧은 기간에 89회라는 경이적인 출격을 감행했다. 적 탱크진지 공격과 보급로 차단작전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는 생전에 소원했던 100회 출격을 못다 채우고 조국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하였다. 1952년 8월 2일. 연일 계속된 출격에도 지칠 줄 모르던 박두원 중위는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89회째 출격에 나섰다. 목표는 내금강에 위치한 장안사였다. 그 일대는 무수한 적의 자동화기진지가 있었고, 동부전선의 보급집결지로서 중요한 요새지였다. 편대장 전봉희 소령이 이끄는 무스탕기 편대에 그가 3번기로 가릉기지를 이륙해 북으로 기수를 향했다. 이날따라 기상이 불량해 5,000피트에 구름이 깔려있고 가랑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계획된 고도를 취하지 못했다. 그가 4,500피트로 구름 밑을 스치면서 경포대, 주문진을 지나 속초 상공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적의 대공포화가 맹렬하게 치솟았다. 악천후 속에서 회피할 순간도 없이 그의 3번기가 번쩍하는 섬광을 내며 사라졌다. 특수 폭탄을 장착한 박 중위의 전투기가 적 대공포에 맞아 공중 폭발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비상탈출을 시도해 낙하산을 폈지만 이미 온 몸에 파편을 맞은 후였다. 오직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멀리 현해탄을 건너와 멸공전선에 앞장섰던 박두원 중위는 꽃다운 젊음을 아낌없이 조국의 하늘에 바쳤다. 그는 공군 전투기조종사가 되면서부터 평소에 조국 하늘의 완전한 자유를 꿈꾸며 100회 목표달성을 눈앞에 두었던 그는 89회를 마지막 출격으로 산화했다. 다음날부터 동료조종사들이 그의 영정을 들고 교대로 출격해 100회 출격기록을 세우게 됨으로써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죽어서도 조국 하늘을 지킨 불사조가 되었다. 박두원 중위는 이러한 공로로 공군 중위에서 공군 대위로 1계급 특진하였으며, 1952년 10월 15일에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다. 강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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